덕중의 덕이라는 양덕들은 1993년에 나온 걸작 FPS '둠'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이 게임을 PC나 콘솔에서만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까웠다. 이에 이들은 뭔가 '컴퓨터스럽기만' 하다면 어떤 기계라도 가리지 않고 해킹해 둠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는 일종의 놀이가 됐다.
이런 사례를 모아놓은 블로그 포스팅을 보면 실로 기상천외하다. 아이팟이나 애플워치 같은 기계는 애교 수준이고, 자동차 엔터테인먼트 유닛과 맥북 프로의 터치바(맥북에서 돌린 게 아니다!), 은행 ATM, 병원 초음파 진단기, 오실로스코프 등 온갖 기계에 둠을 이식해 놓고 '둠이 돌아간다(It runs Doom)'라는 성공 메시지를 남겨놓곤 한다.
요즘처럼 해킹이 돈을 노리는 범죄와 동의어가 되기 이전에는 해커들이 이런 잉여로운 짓에 자기 이름을 새겨놓고 동네방네 자랑하는 것을 낙으로 삼던 시절이 있었다.
<포르쉐911에 이식된 둠. 컨트롤은 어떻게 하는지 끝까지 지켜보자>
그런데 이는 최근 게임 업계가 추구하는 미래와 닮은 면이 있다. 어떤 플랫폼에서라도 언제든지 즐길 수 있는 게임. 물론 게임 업계는 여기에 클라우드나 스트리밍처럼 고급스러운 단어를 붙이곤 하지만 결국 궁극적인 지향점에서는 둠을 해킹해 손목시계에서 돌리는 것과 비슷한 구석이 엿보인다.
해가 갈수록 점점 흥하고 있는 미국 IT 종합 전시회인 CES에서도 이런 추세는 뚜렷하다. 이미 지난해 E3에서 대세를 입증한 클라우드 게임은 올해 CES를 앞두고 주최 측인 미국소비자기술협회(CTA)가 선정한 올해의 주목할만한 트렌드 가운데 하나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구글·마이크로소프트(MS)·엔비디아 등 공룡 IT 업체들은 클라우드 게임이 스마트폰의 평균 사양은 낮지만 인구가 많고 성장성이 높은 신흥국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최적의 무기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선진국 시장에서도 플레이 방식이 간편한 클라우드로의 전환은 거스를 수 없는 물결로 여겨진다. 올해 출시 예정인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5'와 MS의 '엑스박스 시리즈X'가 사실상 마지막 콘솔 제품이 되리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국내 게임 업체 중 펄어비스는 이번 CES에서 자사 대표 게임 '검은사막 모바일'을 SK텔레콤의 5G 모바일 엣지 컴퓨팅 기반 게임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시연했다. 델과 레이저 등 하드웨어 제조 업체도 이번 CES에서 클라우드 게임을 뒷받침하는 스마트폰용 컨트롤러와 전용 단말기 등을 선보이며 대세에 동참했다.
<레이저가 내놓은 스마트폰용 게임 컨트롤러 ‘키시’. 출처= 레이저 홈페이지>
물론 아직은 클라우드 게임이 보편화하기까진 넘어야 할 벽이 많다. 구글의 클라우드 게임 서비스 '스태디아'는 출시 직후 속도 지연 문제로 애를 먹고 있다. 이는 게임이 돌아가는 서버가 사용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클라우드 게임의 특성상 '빛의 속도'로 왕복하는 시간이 체감될 수밖에 없다는 근본적 한계에 기인한다.
1초에 60프레임으로 돌아가는 게임은 한 프레임이 지나가는 데 16.6ms가 소요된다. 그런데 빛은 지구를 한 바퀴 도는데 대략 133.3ms 정도가 걸린다. 서부 총잡이처럼 총을 재빨리 꺼내려고 패드를 난타하는 순간에 느긋하게 반 박자 쉬고 총집에 손을 넣는 게임 속 캐릭터를 보고 있노라면 상대방 총에 맞아서가 아니라 화병으로 먼저 사망할지도 모른다.
이에 서버 등 인프라의 확충과 함께 초저지연을 특성으로 하는 5G 통신망의 보급은 클라우드 게임의 선결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지난해 한국·미국·중국·일본 등에 이어 유럽 각국과 캐나다·호주 등지에서 5G 서비스가 시작되는 올해는 가히 클라우드 게임의 원년으로 후세에 기록돼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파나소닉이 CES에서 선보인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시스템(IVI). 출처=파나소닉 홈페이지>
오히려 이번 CES에서 게임의 다른 가능성은 모빌리티를 통해 발견되고 있다. 유수의 자동차 업체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붙여진 '라스베이거스 모터쇼'란 별명에 걸맞게 이번 CES에서도 본래 업종과 관계없이 다양한 업체가 모빌리티 제품·서비스를 들고 나왔다.
소니는 부스 한가운데 프로토타입 전기차 '비전-S'를 전시해 눈길을 끌었고, 파나소닉은 아예 TV를 치우고 커넥티드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현대차는 관심을 하늘로 돌려 UAM(Urban Air Mobility·도심 항공 모빌리티)이라는 개념과 함께 수직이착륙이 가능한 1인 모빌리티 기기 PAV(Personal Air Vehicle·개인용 비행체)를 선보였다.
도로 위 자율주행은 이제는 어디 내놓을만한 신기술 취급을 받지 못한다. 대신 싼 가격을 장점으로 내세운 보급형 자율주행 솔루션이 이번 CES에서 선보였다. 독일 자동차 부품 회사인 ZF는 소비자 가격 기준으로 1천 달러 미만에 '레벨2+' 수준의 자율주행차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제 기존 차량에 100만원 남짓만 추가하면 반자율주행 정도는 가능하단 얘기다.
이런 모빌리티 혁명은 머잖아 우리의 현실에도 와닿을 물결이다. 국토교통부가 세계 최초로 레벨3 자율주행 안전기준을 도입하면서 올해 7월부터 국내 도로에서도 '부분 자율주행차'가 달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레벨3 자율주행은 운전자를 지원하는 정도인 현행 레벨2를 뛰어넘어 고속도로처럼 지정된 작동 영역 안에서는 핸들을 놓아도 차가 알아서 가는 수준이다. 가끔 필요할 때만 운전대를 잡아주면 된다. 운전면허가 도입된 이래 언제나 운전자의 최우선 덕목이었던 '전방주시 의무'가 역사책 한쪽 편으로 밀려날 날이 머지않은 셈이다.
운전자가 차 안에서 운전에 신경 써도 되지 않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막히는 길 위에서 합법적으로 안전하게 딴짓을 할 수 있다면 생각만 해도 신이 난다. 디스플레이가 8개나 달린 삼성전자의 '디지털 콕핏'에서 넷플릭스나 유튜브만 보기는 좀 아쉽다.
<테슬라에서 돌아가는 ‘비치 버기 레이싱2’. 출처=테슬라 유튜브 채널>
이 방면에서 가장 앞서 나가는 사람은 역시 혁신과 기행의 사업가, 일론 머스크다. 12살 나이에 처음 게임을 개발해 팔아본 푸른 싹수의 게임 덕후 머스크는 테슬라의 넓은 화면과 강력한 컴퓨팅 파워를 내비게이션으로만 쓰기엔 아쉬웠는지 여기에 게임을 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테슬라는 작년 여름부터 '폴아웃 쉘터', '컵헤드', '스타듀 밸리' 등 게임을 차량용 버전으로 내놓고 있다. 아직은 정차 상태에서만 플레이할 수 있지만, 앞으로 규제 문제가 해결되고 테슬라의 자율주행 기능이 레벨3 이상으로 업그레이드된다면 이 정도 수준에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번 CES에서 파나소닉은 자율주행차의 앞 좌석에 앉아 전면 디스플레이를 통해 게임을 즐기는 장면을 시연하기도 했다.
아직 차량 속 게임은 재미있는 아이디어, 좀 별난 시도 정도다. 현재까지 나온 게임도 단순 이식작 수준이다. 그러나 시작은 이제부터다. 수많은 버튼과 조종간이 달려있고 그중 대부분이 실제로 작동하는 자동차라는 공간은 얼마나 많은 게이머와 개발자들의 로망과 상상력을 자극할까. 실제로 테슬라에 이식된 레이싱 게임인 '비치 버기 레이싱 2'는 핸들과 브레이크 페달로 컨트롤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앞으로 사람이 전혀 필요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레벨5 자율주행차가 도입되면 아예 운전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차 안은 엔터테인먼트를 위한 공간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위치기반 증강현실(AR) 게임 '포켓몬GO'가 낳은 파급 효과를 떠올려 본다면 빠르게 이동하는 차량에서 돌아가는 게임은 어떤 영감과 가능성을 품고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빠르게 진화하는 모빌리티는 어쩌면 게임 업계의 운명을 안고 달리는(It runs doom) 새로운 틀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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