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 활용의 다양한 가능성 2020-02-28

 

| #1. 


혈액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7살 딸을 가상현실(VR)에서 다시 만난다. 그리운 딸이 생전의 목소리와 몸짓 그대로 엄마를 부른다. 엄마는 살아 숨 쉬는 듯한 딸의 모습에 목이 멘다. 


최근 MBC에서 방영된 특집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 이야기다. 떠나간 딸 나연이를 최대한 생생하게 재현하기 위해 여러 기술이 쓰였다. 남겨진 사진과 영상에서 얻은 아이의 목소리, 몸짓, 말투를 분석했다. 비슷한 나이의 아이를 모델로 VR 속 나연이의 모습을 만들었고, 모션 캡처와 음성인식, 딥러닝 등으로 딸의 숨결을 엄마에게 돌려주었다. 제작진은 기술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을 위로하고 치유를 돕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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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스페셜-특집 VR다큐 '너를 만났다'. 출처=MBC>

 

| #2.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블랙 미러'의 한 에피소드에는 자신만의 가상 세계를 구축한 게임 개발자가 등장한다. 그는 전설적인 개발자로 게임 회사의 중역이지만 대인 관계에는 서툴러 사내에서 은근히 따돌림당하는 처지다. 그러나 자기가 만든 가상 세계 우주 탐험선 'USS 칼리스터'에서는 회사 직원들이 승무원으로서 선장인 그에게 절대복종한다. 스타트렉과 비슷한 이 세계에서 그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내는 영웅이며, 현실에서 자신을 따돌리는 직원들을 철저히 지배한다. 그가 매일 집착적으로 VR에 접속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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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미러 시즌 4 'USS 칼리스터' 에피소드. 출처=넷플릭스>


사람들은 늘 새로운 세계를 원한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져들며, 드라마에 몰입하고,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에 열광한다. 현재 VR은 가장 정교하고 실제로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아직 기술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착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VR이 USS 칼리스터와 같은 폐쇄적 도피처가 아니라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공간으로 자라도록 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너를 만났다' 제작진도 이런 우려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이들은 기술을 넘어 엄마와 딸의 추억에 집중해 공감을 끌어내는 스토리텔링에 힘을 쏟았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나비와 감자꽃, 나연이의 분홍색 가방 등이 그러한 스토리텔링의 소재였다. 공감을 통해 남은 가족이 떠난 아이를 새로운 방식으로 기억케 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것은 치유의 길과도 연결되어 있다. 


| 치유의 공간으로 활용되는 VR 


이 프로젝트는 유튜브 영상 조회 1500만 회를 넘기며 뜨거운 반응을 얻었고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뜨거운 반응만큼 우려도 만만치 않았다. 엄마의 심리와 마음은 충분히 챙겼는지, 가족과 아이의 건강한 이별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들이었다. 


이런 식의 VR 활용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직 더 지켜봐야 할 터다. 하지만 아픈 기억 속으로, 해결되지 못한 과거로 돌아가 그 안에서 자신을 다시 만나는 경험이 갖는 치유의 힘은 분명 무시할 수 없다. '너를 만났다'의 VR 작업을 담당한 비브스튜디오스 김세규 대표의 말처럼 "이머시브(immersive, 몰입형) 콘텐츠가 어떻게 사람에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한 가지 방향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심리 치료는 VR의 중요한 활용 방안 중 하나로 주목받는다. 영국의 의료보건 담당 기관인 국민보건서비스(NHS)는 VR을 활용한 심리 치료 및 상담의 가능성을 살피기 위해 '게임체인지(gameChange)'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다.


영국 옥스포드대학 임상심리학과 교수 등이 창업한 옥스포드VR 같은 스타트업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이 회사는 VR 환경의 인지행동치료를 제공한다. 


(* 인지행동치료에 대해 사전에는 '인지 과정에 대해 고려하고 환자가 환경을 지각하고 해석하며 반응할 수 있도록 돕는 인지적 기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특화된 기술을 사용하는 확장된 행동 치료'라고 정의되어 있다. 대략 자신의 생각을 인지하고 교정해 문제 되는 행동이나 증상을 고쳐나가는 치료법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내담자는 VR 헤드셋을 끼고 가상 현실 속에서 처음 증상을 촉발했던 상황에 다시 놓인다. 이 안에서 내담자는 문제 극복을 위한 과제를 수행하고, 상담을 받는다. 


직접 의사나 상담자를 대면하며 상담받는 것보다는 효과가 떨어질 수 있지만, 내담자가 VR을 통해 습득한 변화를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효과가 기대 이상이었다는 평가다. 이 회사는 최근 1,000만 파운드(약 160억 원) 규모의 초기 투자도 받았다. 정신건강 치료를 혁신하고 환자들의 진입 장벽을 낮춘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 이것이 일의 미래...VR로 협업하며 원격근무


VR이기에 가능한 몰입과 참여의 경험을 활용한 사례다. 기존 방식으로는 어려웠던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하거나 지금까지 하던 것보다 효율을 높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따라 VR을 다른 분야에 적용하려는 시도도 이어진다.  


기업에서도 당연히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근무 환경이 달라지면서 원격 근무나 협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VR 환경에 가상 사무실을 구현하고 각자 집에서 협업한다면 어떨까? 


증강현실(AR) 기기 '홀로렌즈'를 만드는 마이크로소프트는 AR을 활용한 협업 시나리오를 제시한 바 있다. 현장 직원이 생소한 문제를 만나 외부에 있는 동료에게 현장 상황을 전하고, 외부 직원은 현장 직원의 홀로렌즈 기기로 디지털화된 정보를 전달하며 도움을 주는 방식이다. 미국의 스페이셜이라는 기업은 3D 홀로그램으로 구현한 가상 회의실 솔루션을 판다. 직원들이 아바타로 서로 대화하고, 실제 사무실에 있는 것처럼 포스트잇에 메모를 공유하는 등의 방식으로 협업할 수 있다. 장난감회사 마텔, 식품회사 네슬레 등을 이미 고객사로 두고 있다. 


<스페이셜(Spatial) VR 회의실 소개 영상> 


글로벌 전자제품 제조 대행 (EMS) 기업 플렉스는 제품 디자인과 설계 등에 VR 기술을 활용한다. 엔지니어와 고객들이 3D로 표현된 제품을 보며 논의할 수 있다. 월마트는 직원들이 매장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문제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VR 시뮬레이션을 활용해 교육한다. 


부동산이나 인테리어 시공사는 VR로 완공된 건물을 생생하게 미리 보여줄 수 있고, 호텔은 인근 관광 명소를 투숙객에서 보여줄 수 있다.

 

|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또 다른 방법 VR 


소셜미디어나 게임의 양상도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페이스북은 VR 소셜 네트워크 '호라이즌'을 올해 선보일 계획이다. VR 세계 속에서 친구들의 아바타와 대화하거나 게임을 하며 어울릴 수 있다. 페이스북의 VR 버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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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VR 서비스 호라이즌. 출처=오큘러스 홈페이지>


우리나라에서는 '포커스온유'와 '로건' 등의 VR 게임을 선보인 스마일게이트가 VR의 다양한 가능성에 도전하고 있다. 포커스온유는 여주인공과의 교감에 초점을 맞춘 VR 연애 어드벤쳐 게임이다. 정교한 스토리와 음성인식, 아름다운 그래픽 등이 더해 첫사랑의 풋풋한 감정을 전한다. 로건은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사용자가 도둑 로건이 되어 사건을 풀어가는 잠입 어드벤처 게임이다. 


기술의 발전은 VR의 잠재력을 더욱 확대할 전망이다. 빠르게 보급되고 있는 5G 통신은 VR 콘텐츠를 더욱 빠르고 편리하게 누길 수 있게 할 기반이 될 것이다. 


현재 VR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도 이어진다. 애플은 최근 뇌전도 센서를 활용, 참가자의 행동을 보다 정밀하게 반영하는 VR 협업 회의실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다. 페이스북 역시 생체전위신호를 감지해 표정의 미세한 변화까지 VR 아바타에 반영하는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를 개발 중이다. 물건을 만지거나 집어 드는 촉각까지 느낄 수 있는 VR 장갑도 페이스북 연구실에서 개발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그간 불편한 착용감과 어지러움, 멀미 등 VR의 잠재력에 제약을 가한 여러 요소들을 극복하며 지금은 생각하지 못하는 새로운 활용 방안들이 잇달아 나오리라 기대된다.  

 

| VR에 이야기를 더하라 


VR은 처음 나온 지 30년이 지난 여전히 잠재력 높은 기술로만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일까. VR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여전히 기술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확실히 기술은 더욱 몰입할 수 있는 가상 환경과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중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몰입과 참여를 끌어내는 공감과 이야기를 더한다면 VR의 가능성은 보다 빨리 현실이 될 것이다. 기술을 넘어 공감과 이야기를 전해주려는 노력이 뒷받침될 때, VR은 일하는 곳에서, 배우는 곳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곳에서 우리의 삶을 더 좋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EDITOR's COMMENT  


#한세희 IT 칼럼니스트

씁니다. 기술과 사람이 서로를 바꿔가는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문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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