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인류의 본능이에요.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게임’ 즉 ‘놀이’ 본능을 갖고 태어납니다. 고도의 기술과 광대한 네트워크가 결합되면서 현대의 ‘게임’은 전 세계 유저를 하나의 ‘거대한 세계’로 불러 모았죠. 앞으로 필요한 건, 그 세계를 차별화할 수 있는 ‘원천 기술’로서의 스토리텔링입니다. 이미 스토리텔링이라는 원천 기술을 둘러싼 전쟁은 시작됐어요.”
듣는 순간, 머릿속에 전구 하나가 반짝 켜지는 것 같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변별력 있는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지만, ‘스토리텔링’이 ‘원천 기술’이라는 표현은 확실히 전환적 발상이다. 지난 20년간, 이준익 감독이 만든 영화는 항상 ‘전환적 발상’에서 시작됐다.
돌이켜보면 그의 영화는 소위 ‘스포일러’가 없다. 연산군이 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는지, 윤동주가 어떤 시를 썼는지, 영조가 어떻게 사도세자를 죽게 했는지, 조선의 학자 정약전이 흑산도에 유배되어 조선 최초의 ‘어류도감’을 썼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이미 중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배워서 알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다 안다고 여겼던 역사적 사실들이 이준익 감독이라는 필터를 거치면 시대를 뛰어넘어 뜨거운 카타르시스를 전하는 ‘스토리텔링’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 그 눈이야말로 이준익 감독의 ‘크리에이티브’의 본질이다.
이준익 감독의 ‘넓은 눈’은 남다른 경험의 결과다. 대학에서 동양미술을 전공한 미술학도였고, 천 여 편의 영화를 홍보한 잘나가는 영화 마케터였고, 1990년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은 영화 산업계를 주도한 영화사 ‘씨네월드’를 세운 제작자이며, 한국 최초의 ‘천만 사극’ <왕의 남자>를 포함해 14편의 영화를 만든 한국 대표 감독까지. 한국 영화계에서 이런 ‘올라운드 플레이어’는 이준익 감독이 유일하다. 엔터테인먼트 산업계의 ‘판을 읽는 넓은 눈’과 이야기의 ‘디테일을 포착하는 깊은 눈’은 지난 30년간, 이준익 감독에겐 생존의 필살기였던 셈이다. 그가 생애 최초로 영화가 아닌 ‘OTT 시리즈’ <욘더>를 만든 것도 그의 혜안이 작용했을 게 분명했다.
Q. 이준익 감독님의 차기작이 OTT 오리지널 시리즈라는 뉴스를 접했을 때, 다들 많이 놀랐습니다. 영화가 아닌 드라마 시리즈를 선택하셨을 땐, 분명한 이유가 있으셨겠지요?
A. 지금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대전환기이자 격변기입니다. 1~2년 이내에 소위 ‘주류’가 바뀔 거예요. 우선 영상 콘텐츠의 플랫폼부터 변화하고 있잖아요. 예전엔 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가던 사람들이 점차 TV나 모바일로 OTT 콘텐츠를 관람하는 게 일상이 됐어요. 일반적으론 코로나 팬데믹이 이런 변화를 초래했다고 여기지만, 이미 진행되던 변화가 코로나로 인해 체감이 빨라진 것뿐이에요.
Q. 대전환기이자 격변기라는 말씀에 크게 공감이 갑니다. ‘주류’가 바뀐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일까요?
A. 이제 플랫폼의 경계는 사라졌어요. 영화냐, 드라마냐, 게임이냐 하는 구분은 ‘유저’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어떤 스토리텔링이 내게 더 큰 카타르시스를 줄 것인가. 그것만이 중요해졌어요. 앞으로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는 ‘스토리텔링 비즈니스’로 전환될 거예요. 이런 변화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주류였던 ‘한국의 영화 산업’의 성장 과정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어요.
Q. 한국 영화 산업의 성장과정에서 이준익 감독님이 주목하시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A. 한국 영화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난 20년간 괄목할 만한 급성장을 이뤄냈죠. 그 동력을 정확히 살펴보면, 극장 산업의 변화였어요. 2000년대 초반 멀티플렉스가 자리 잡으면서 ‘더 많은’ 영화가 필요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젊은 창작자들이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고, 2000년대 초반 봉준호, 박찬욱 감독 같은 젊은 창작자들이 새로운 영화를 만들 기회를 얻은 거죠. 멀티플렉스라는 새로운 플랫폼이 새로운 크리에이터를 키운 셈이죠.
Q. 단박에 정리가 되네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요소 중에서도 플랫폼의 변화가 핵심이었군요.
A. 그렇죠. 동시에 ‘스타 시스템’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강력한 무기로 성장했습니다. 관객이 극장에 가는 시간과 노력 같은 ’수고’와 ‘비용’을 감수하게 만들 힘을 가진 ‘스타’가 중요해진 거죠. 소위 ‘스타 파워’가 흥행을 좌우했고, 영화사들도 ‘스타 배우 캐스팅’에 성공하면 제작 투자를 받을 수 있었죠. 그런데 이젠 아닙니다. 일단 OTT 플랫폼이 일반화되면서 플랫폼이 안방으로 들어왔잖아요. ‘스타’를 보기 위해 비용을 더 지불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이제는 콘텐츠를 선택할 때 스타보다 ‘스토리’가 더 큰 힘을 갖게 됩니다. 나를 만족시킬 스토리인가 아닌가. 그걸 중시하죠. 영화, 드라마, 게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스토리’가 가장 중요한 원천 기술인 ‘스토리텔링 비즈니스’가 되는 거죠.
Q. 게임 산업에서 점차 ‘차별화된 세계관을 가진 IP’를 중시하는 경향도 감독님의 분석으로 설명이 되는 것 같습니다.
A. 제가 직접 게임을 즐기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미래의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으로서 게임 산업에 주목한 건 꽤 오래전부터죠. 사실 ‘게임’은 인류가 태동한 이후 우리의 DNA에 뿌리내린 본능이잖아요.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모두 ‘유희 본능’이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게임의 형태’가 달라질 뿐이죠. 저는 오락실에서 ‘갤러그’ 게임을 하던 세대지만(웃음), 거대한 네트워크 상에서 수백만의 유저들이 함께 ‘하나의 세계관’을 경험하는 현대의 게임을 보면서 ‘미래의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을 상상합니다. 저는 창작자란 ‘과거의 플랫폼과 미래의 플랫폼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Q. ‘과거의 플랫폼과 미래의 플랫폼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 창작자, 크리에이터에 대한 이준익 감독님의 정의는 확실히 남다르게 들립니다.
A. 아마 제가 여러 역할을 경험했기 때문일 겁니다. 지난 20년간 14편의 영화를 만든 영화감독이기도 하지만, 영화를 홍보하는 마케터이자, 만드는 제작자이자, 해외의 영화를 수입하는 유통업자로 살았으니까요. 살아남기 위해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엔터테인먼트 시장을 늘 주시하고, 큰 변화의 이유를 찾고 예측해야 했어요. 이런 경험 속에서 결국 과거의 플랫폼과 미래의 플랫폼 사이에 ‘내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현재 나에게 ‘밥을 주는’ 이 플랫폼은 미래의 플랫폼과 얼마나 가까운가, 반대로 소외되어 가고 있는가. 30년간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얻은 결론이죠.(웃음)
Q. 곧 공개될 OTT 시리즈 <욘더>는 크리에이터로서 이준익 감독이 ‘미래의 플랫폼’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결과라고 볼 수 있겠네요. 시리즈는 첫 작업인데 어떠셨어요? 새로운 경험이셨을 것 같습니다.
A. 새롭다기보다는 편안하고 즐거운 작업이었어요. 시리즈는 영화와 툴이 완전히 다른 작업입니다. 영화는 스토리의 압축이 핵심 기술이라면, 시리즈는 소위 ‘알집을 푸는’ 작업이에요. 이야기를 펼쳐서 보여줘야 하는 거죠. 스토리를 구성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영화는 2시간 안에 주인공을 중심으로 관계와 사건을 잘 압축하는 게 핵심이죠. 압축의 미학과 미덕이 있는 반면, 압축의 폭력도 있어요. 이야기가 피라미드 형식이 되거든요. 주인공 아래 조연이 있고, 그 아래 단역이 있어요, 결국 ‘주인공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기능을 해야 하죠. 하지만 시리즈는 다채로운 인물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이 중요해요. 압축을 위한 압축을 할 필요가 없으니, 이야기의 확장성이 커지죠. 다양한 인물의 입장을 다 펼쳐서 보여줄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었어요.
Q. 지금까지 이준익 감독님의 작품이라면 ‘사극’을 떠올릴 만큼, 한국 영화사에 중요한 사극을 만들어오셨는데 이번 <욘더>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장르입니다. 2023년 배경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로부터 메시지를 받은 한 남자가 그녀를 만날 수 있는 디지털 세계 ‘욘더’에 초대받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죠. 이 이야기를 하신 이유도 궁금했습니다.
A. 역사 속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우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극이나, 미래의 상상을 통해 ‘현재의 우리’를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SF가 근본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해요. 특히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이 기술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그려보는 거죠. 결국은 인간의 삶과 죽음, 삶의 태도,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제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스토리텔링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어떻게 하면 ‘서양 문명의 스토리텔링 감옥’에서 탈출해서 우리의 ‘원천 스토리텔링 IP’를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Q. ‘서양 문명의 스토리텔링 감옥’이라는 표현이 강렬하네요.
A. 저는 좀 더 강하게 ‘정신적 기저질환’이라고까지 말하곤 합니다.(웃음) 창작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구상할 때, 어쩔 수 없이 서양 문명의 스토리텔링 법칙을 따라가요. 예를 들어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인간의 원천 스토리로 여기고,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딧세이’는 모험 이야기의 최고봉으로 치면서, 동양 문명의 신화나 설화는 ‘미신적’이라고 여기는 거죠. 저도 어린 시절부터 할리우드 영화를 좋아하는 ‘할리우드 키드’였고, 서양 문명을 ‘이야기의 원형’으로 배우면서 자랐어요. 그러다 서른 즈음에, 번뜩 ‘아차!’ 싶었습니다. 나는 창작자로서, 서양 문명의 스토리텔링 감옥에 갇혀 있구나. 이렇게 서양 문명의 원천 IP만 따라가다간 종속될 수밖에 없겠구나. 그래서 <황산벌>을 만든 거고, <왕의 남자>를 만들었어요. 서양 문명의 스토리텔링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서였죠. 제가 그간 사극을 만들어 온 이유이기도 하죠.
Q. 이준익 감독님의 ‘사극 연대기’는 동양 문명의 스토리텔링 IP 원천 기술을 향한 도전이었군요!
A. 탈출하려고 아등바등 무던히 애쓰는 데도, 아직 멀었어요. 괴롭죠.(웃음) 하지만 한국 콘텐츠가 글로벌 호응을 얻고 있는 지금, 더욱 중요하고 필요한 도전입니다. 저는 콘텐츠 플랫폼이 국경을 넘어서고, 한국 콘텐츠가 세계적인 반응을 얻는 현재 상황이 서양 문명의 스토리텔링이 서서히 저물어가는 징후라고 봅니다. 지난 100년간, 한국이 서양 문명의 스토리텔링을 배워서 콘텐츠를 만들어오다가, 이제는 추월해 버렸거든요. 이제 남의 것을 ‘따라갈’ 필요가 없는데, 우리의 이야기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우리의 정체성, 아이덴티티를 담은 스토리를 발굴해야 할 때인 거죠.
Q. 스마일게이트도 ‘주춧돌 IP’를 기반으로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확장하는 콘텐츠 전략을 세우고 있습니다. 감독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한 전략인 것 같네요.
A. 스토리텔링 IP 원천 기술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면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밖에 없어요. 특히 게임의 경우 더 광대한 네트워크로 더 많은 유저를 한 공간에 모이도록 하는 기술이 있잖아요. 그다음 단계는 어떤 스토리와 어떤 캐릭터로 유저에게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할 것인지 연구해야 합니다. 모든 크리에이터가 아주 중요한 분기점에 서 있다고 생각해요.
Q. 크리에이터로서, 이준익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훌륭한 스토리텔링’이란 무엇일까요.
A. 정말 많은 요소가 있겠지만, 딱 한 가지만 꼽는다면 카타르시스의 유무입니다. 그렇다면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고통의 순간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고 버티는 과정에서 산출되는 자기 정화의 경험이에요. 영화, 드라마, 게임 같은 ‘허구의 이야기와 경험’이 인간에게 필요한 이유죠. 현실에서 겪지 못하는, 혹은 겪을 수 없는 허구의 경험에 공감하면서 억눌렸던 나의 고통이 눈 녹 듯 해소되는 상태가 바로 카타르시스입니다. 결국 크리에이터란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내는 사람이고, 스토리텔링 비즈니스의 목표는 유저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Q. 그렇다면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준익 감독님의 노하우를 하나만 전해주신다면요?
A. 글쎄요. 저는 이미 모든 사람이 ‘크리에이터’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신의 ‘스토리’위에 서 있거든요. 인간과 미물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바로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어제 일 중에 가장 인상적인 기억을 이야기해 보세요’라고 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요. 이미 ‘스토리텔러’죠.
Q. 모든 인간은 ‘스토리텔러’라는 이야기가 굉장히 힘이 되는데요?
A. 그럼요. 내가 ‘나의 이야기 위에 서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우치기만 하면 됩니다. 누구나 100% 이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선, 자기 이야기에 대해 직접 말로 설명하는 연습을 하면 좋죠. 자신의 이야기를 설명하다 보면 아주 재미있는 공통점이 생겨요. 자기 이야기 안의 모순과 구멍을 스스로 발견하게 됩니다. 그다음엔 그 모순과 빈틈을 메우기 위해 각색을 하거든요. 조금 더 말이 되게, 개연성 있게, 감동적이게 살을 붙이게 되죠. 그게 바로 ‘스토리텔링’입니다. 자기모순의 구멍을 메우면서, 타자와 공감대를 넓히면서 점점 더 훌륭한 스토리텔러가 되는 겁니다.
Q. 마지막 질문입니다. 항상 이준익 감독님의 차기작이 궁금했지만, 미래의 플랫폼을 향한 이준익 감독님의 ‘스토리텔링’이 더욱 궁금해지는데요. <욘더> 이후 구상하고 계신 스토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A. 나의 이야기의 ‘뿌리’, 아이덴티티를 가진 ‘원천 IP’를 선보이려고 해요. 10년 전부터 구상했던 이야기인데요, 제주 설화의 이야기와 <스타워즈>의 세계관을 접목시킨 판타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주 설화엔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즐비하거든요. 이 캐릭터들과 <스타워즈>의 방대한 세계관을 결합해서 원천 IP로 개발할 계획입니다. 굉장히 큰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이제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하려고요.
단, 콘텐츠를 기사에서 인용 시 ‘스마일게이트 뉴스룸’으로 표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