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내가 사는 여기는 진짜가 아닐지 몰라." 2019-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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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 포스터 (출처:네이버 영화)>


(‘출발! 비디오여행’의 코너 ‘영화 대 영화’를 떠올리며 읽어주세요.) 


여기,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받은 남자가 있습니다. 해커로 나름대로 성공한 그에게, 한 사내가 나타납니다. 그의 요구는 약 둘 중 하나를 골라 먹으라는 것. 재래식 화장실도, 판문점도 아닌 곳에서 빨간색과 파란색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이 남자의 이름은 네오(Neo). 영화 ‘매트릭스(Matrix)’의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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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약과 파란 약 (출처: W.carter, Wikipedia> 

 

네오를 찾아온 남자는 그의 선택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빨간 약은 그에게 ‘진실’을 알려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진실은 그가 온 세상을 구할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신, 지금까지 그가 살아 믿어온 모든 것, 바로 그의 현실이 허물어집니다. 반면, 파란 약은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를 지켜줄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네오의 삶은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세상의 빈틈을 찾아낸 해커로서, 비록 어느샌가 반정부세력으로 몰려 비밀요원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됐지만, 인정받는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네오에게는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의구심이 있습니다. 이 남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의 선택은 온 세상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일까요? 그 자세한 결론은 이제는 초특급 메이저 프랜차이즈가 된 영화, 그리고 첫 작품 발표 후 20년을 맞아 4편 제작이 예고된 ‘매트릭스’ 시리즈의 첫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사는 여기는 진짜가 아닐지 몰라.” 


이런 상상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인기를 끌어왔습니다. 멀리는 17세기 김만중의 한글 소설 ‘구운몽’으로 시작해, 앞서 다룬 매트릭스, 현재로 오면 수많은 라이트 노벨이 비슷한 주제를 다룹니다. 어찌나 비슷한 이야기가 많은지 ‘이고깽(이세계로 간 고등학생이 깽판을 친다)’이라는 줄임말로 장르를 부를 정도입니다. 


이런 장르 창작물은 게임을 즐기는 이들과 만드는 이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줬습니다. 구운몽은 현대에 여성향 할렘물 게임(네오앨리스, <구운몽~어느 소녀의 사랑이야기>)으로 탄생했으며, 매트릭스 역시 여러 차례 게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다른 형태로 성공한 문화 상품이 게임으로 옮겨오는 것은 아주 흔한 일입니다. 특히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경험을 주는 이야기라면 말입니다.


이야기를 좀 돌려보겠습니다. 게임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 지도 벌써 40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게임이 문화에 영향을 미치게 된 시점을 얘기하자면 이 작품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바로, ‘MMORPG’라는 말을 만들어낸 ‘울티마 온라인’입니다. 이 게임은 PC용 RPG로 유명하던 울티마를 온라인 게임으로 만든 것입니다. 처음 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1997년. 아직 대부분 사람들에게 인터넷이 익숙하지 않던 때입니다. 지금은 ‘샌드박스’ 스타일로 부르는 ‘플레이어에게 무제한에 가까운 자유를 보장해주는 게임’이 바로 울티마 온라인이었습니다.

 

<'울티마 온라인 : 트리스탄의 브리타니아 여행기'. MMORPG는 큰 필드와 다른 플레이어와의 협업 플레이를 통해 다른 시공간을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울티마 온라인은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MMORPG라 부르기도 민망한 게임이었습니다. 서버 동접자라고 해봐야 수백 명인 경우가 많았고, 스토리 진행 역시 허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많이 쓰는 기술일수록 점점 더 숙련되는 스킬 시스템을 바탕으로, 사냥, 농작물 가꾸기, 물건 만들기에서 살인, 강도, 심지어는 주택 매매 사기까지 가능했습니다. 이런 자유도 높은 시스템이 그 당시 RPG 게이머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런 협의 없이 제각기 역할을 나눠서 플레이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스토리를 따라가며 게임을 즐겼지만, 어떤 이들은 정말 전문적인 농사꾼으로 나섰고, 악당을 자처하고 PK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게임 제작자들은 모두 자기 식의 MMORPG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에버퀘스트가 나왔고, 리니지가 나왔고, 라그나로크가 나왔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나왔습니다.


현재 우리는 앞서 나온 게임을 창작의 모티프로 삼은 수많은 문학, 애니메이션 등 다른 장르 작품을 보고 있습니다. 앞서 얘기한 이고깽물은 과거의 구운몽과 같은 ‘어쩌면 이건 내 인생이 아닐지도 몰라’와 같은 작품들과는 묘하게 궤를 달리합니다. 그 중심에는 게임 시스템을 그대로 차용한 것과 같은 주인공의 성장과 반복되는 ‘노가다’성 레벨업이 있습니다. 게임에 익숙한 현대 고교생이 이세계로 전이해서 게임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성장한다는 식이죠. 여기에 변주가 이어져 현대에서 게임 시스템을 사용해 성장하는 주인공이 나오기도 합니다. 근원에는 모두 같은 시스템이 있습니다. 성장,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협업을 바탕으로 하는 MMORPG입니다. 


여기에 또다시 창작자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변주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다른 세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상상한 그곳이 게임 속이고, 그곳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면. 혹은 영원히 살아야만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 게임에 들어가는 방법이, 아직 기술 수준이 거기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묻는 게임/소설/만화/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바로 일본 라이트노벨 작가 가와하라 레키의 출세작 소드 아트 온라인입니다. 


<게임을 바탕으로 한 창작물을 바탕으로 한 게임 ‘소드아트온라인 앨리시제이션 라이징 스틸’의 광고 영상. 전형적인 일본 애니메이션 도입부 스타일에 이어 전형적인 일본 게임식 광고 영상이 나온다> 

 

굳이 그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소설을 단 열 페이지만 읽어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만, 작가 가와하라씨는 열렬한 MMORPG 플레이어였다고 합니다. 게임이 현실과 혼동이 될 정도로 오랜 시간 게임을 해본 적도 있고, 게임 속 길드원들이 현실 친구들보다 가깝게 여겨진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충분히 해보셨으리라 믿습니다. 사실 이러한 경험은 게이머들에게 있어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일상은 매일 거의 똑같이 진행됩니다. 매일이 지루하고 내 어떤 행동도 세상에 변화를 주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게임 속 이벤트는 매우 압축적이고 극적입니다. 내 행동 하나하나가 세계에 큰 변화를 줍니다. 게임 속에서 생사를 같이 한 길드원들이 더 가깝게 여겨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여기에 한 차원을 더해봅시다. 우리의 삶과 게임은 어떤 면에서 다를까요? 이게 삶이고, 저것이 게임이란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옛 소설 구운몽의 주인공 성진이 꿈에서 깨어나 한 말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 꿈이란 걸 알 수 있을까요? 온라인에서 내게 친구 신청을 하는 예쁜 여자가 있다면 스팸 계정인 것처럼요? 우리는 게임과 삶의 차이를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게임은 보통 평면 화면을 통해 경험하고, 해상도가 낮고, 냄새와 운동감각을 느낄 수 없습니다. 즉,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현실은 게임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정보량을 제공합니다. 


소설 소드아트온라인 속 게임 시스템은 일종의 VR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현실과 달리 인간의 신경 시스템에 직접 신호를 전달합니다. 뇌를 속여서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 합니다. 게임 시스템의 개입이 없는 한, 실제로 내 몸을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고 설정돼 있습니다. 이에 대해 소드아트온라인의 주인공 키리토는 묻습니다. 과연 정보량이 충분하다면, 현실과 게임 속 가상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 거냐고 말입니다. 


가와하라 레키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액셀 월드’는 AR 게임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게임 시스템 역시 신경계에 직접 신호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소드아트온라인 속과 달리 정보 밀도가 현실 수준으로 높습니다. 원래 현실 위에 가상을 덧대 만드는 것이 AR인데, 현실만큼 해상도가 높은 그림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가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런 일은 일어날 리가 없다는 자기 확신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학교/동네 최고의 미녀가 키도 작고 뚱뚱한 고교 최악의 '찐따'인 나를 좋아하는 이 소설의 근간 전체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여태까지 이러한 소설 속 설정은 모두 문학적 상상력에 불과했습니다. 이들 소설이 쓰여질 때만 해도 가상현실기기는 시험기로밖에 나오지 않았고, 일반 소비자가 쓸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나마도 해상도가 매우 낮았습니다. 누구나 한눈에 이게 현실이다, 아니다를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많은 기업이 VR 기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세계에서 기업 가치가 가장 비싼 기업 마이크로소프트도 있고, 전 세계인의 인간관계를 다 파악하는 페이스북도 있습니다. 아, 물론, 스파이더맨 IP를 보유한 소니도 있습니다. 이들이 구축한 플랫폼을 기반으로 VR 환경을 만들어내는 스마일게이트 같은 회사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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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많은 개인 정보를 가진 회사 페이스북이 인수한 오큘러스에서 만든 스탠드 얼론 VR 기기 오큘러스 퀘스트. VR 기기 중 사용 경험으로는 최고 수준이지만, 페이스북에 VR 영상 시청 기록까지 넘겨주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구매욕을 줄인다. © facebook> 

 

잘 만든 VR 게임을 해본 사람들은 모두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진짜로 다른 세상에 간 기분이었다고. VR이 많은 사람의 시각을 속일 만큼 발전한 것입니다. 잘 만든 AR 사진이나 동영상을 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로 말합니다. 실제로 그 공간에 그 물체가 있는 줄 알았다고요.


 

이제 다시 고민을 몇 문단 앞으로 돌려봅니다. 우리가 정말로 잘 만든 게임 속에 들어와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게임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 수 있을까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처럼 어쩐지 뭔가 거슬리는 버그를 발견했을 때? 하지만 내가 그 버그를 이용해 이번 생을 성공하고 있다면, 이 게임 밖에서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질문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빨간 약? 아니면 파란 약?

 

EDITOR's COMMENT  


#이인묵 DG랩스 수석연구원

특이점을 기다리는 기술 진보주의자.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접점이 생겨날 때 유년기를 보냈다. PC 통신 세대. 세가 새턴, 드림캐스트, 닌텐도64를 보유했던 올 타임 게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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