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월드는 ‘문명’ 4 디자이너 소렌존슨이 파이락시스에서 독립해 설립한 회사인 모호크게임즈에서 만든 두 번째 게임이다.
킁킁, 벌써 냄새가 난다. 대전략(4X)게임의 향이.
실제로도 이 게임을 단순하게 설명하면 ‘고대 시대만 있는 ‘‘문명’’과 가문 간 암투와 승계시스템이 간략화된 ‘크루세이더킹즈(CK)’를 섞어놓은 4X 게임’이다. 실로 묘한 풍미다. 설명만 듣자면 ‘갓겜’혹은 ‘이도 저도 아닌 게임’의 승부존이다. 그래서 두 게임을 기반으로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는 것이 게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큰 틀에서 올드월드는 4X 게임 문법을 충실히 따른다. 당신은 왕이 돼 문화와 전쟁 그리고 기술, 과학, 종교 등 다양한 요소를 제어해야 한다. 탐험하고 확장해 발전시키고 상대를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굴복시켜야 한다. 다른 국가가 우리보다 강하고 우수하지 못하게끔 견제해야 한다.
게임 속에서 나의 왕은 뛰어난 전술가이지만 개인적인 삶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마치 코미디 영화 주인공 같은 모습을 보인다. 전쟁 중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사랑에 빠진 왕이 다른 이유로 정신이 팔려 중요한 전투를 놓치는 모습은 ‘문명’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덕분에 ‘문명’에 CK류 서사를 얹는 게 가능하다. 물론 CK특유의 ‘막장성’은 덜어냈다.
올드월드는 두 게임의 특징적인 모습과 함께 어마어마한 텍스트량도 계승 받았다. 엄청난 양의 툴팁과 백과사전이 존재한다. 위키 같이 링크를 계속 타고 다니는 백과사전이라 볼 일이 더 많다. 한글 없이 하면 상당히 피곤하다. 다행히도 스토브가 유일하게 공식 한국어화 제품을 제공한다. 덕분에 편하고 직관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고맙다 스토브.
‘문명’은 석기시대부터 우주시대까지 다룬다. ‘올드월드’는 고대만 다룬다. 덕분에 선택 하나하나가 더 세분되어 있다.
게임을 시작하면 정찰병 유닛으로 맵을 탐험할 수 있다. 처음 시작할 때 맵은 개척되지 않은 상태다. 수많은 미지 지역과 그 속에 숨겨진 비밀이 플레이어를 기다린다. 야만인, 부족, 국가 그리고 국교가 될 수도 있는 이국의 다양한 교리를 발견해 나간다.
정찰병은 언덕 위에 있으면 더 멀리 본다. 숲에서는 시야가 줄어들지만 은신이 되어 적 동향을 살피기 좋다. 정찰을 통해 발견한 도시 부지에 도시를 설립해 국가를 확장할 수 있다. 수확 가능자원과 사치품을 채취하거나 군을 모아 경쟁국과 부족을 몰아낼 수 있다. 협상이냐 교역이냐 선택지가 주어진다. 선택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4X 계열 문법을 충실히 따랐다.
도시를 발전시키려면 시설과 도로를 만들어야 한다. 시설은 근교시설과 도회시설로 나뉜다. 근교시설에는 농장 광산 채석장 등이 있다. 근교시설은 도회시설이 아닌 모든 타일에 건설할 수 있다. 시설들은 생산품을 제공한다. 알맞은 타일 위에 건설하면 보너스를 준다. 시설에서 일할 전문직을 추가해 더 높은 효율을 낼 수 있다. 전문직은 시설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데 특정 시설에서는 전문직 업그레이드 선택지가 주어진다. 도시 성장에 또 다른 전략적인 성장 선택지가 주어지는 게 흥미롭다.
‘문명’과 차별화한 부분도 곳곳에 보인다. 가장 큰 차이점은 행동력의 제한이다. 여러 행동으로 결정되는 ‘위신’ 수치에 따라 명령권이 생기고 이 숫자만큼 명령을 내릴 수 있다. 한정된 명령은 고대시대 왕들이 목표했던 효율적인 행정력과 일맥상통한다. 실제 역사 속에서 율령이라든가 볍령으로 행정력을 강화시키면 왕명이 닿는 범위가 늘어나듯 게임에서도 명령권을 늘려 유닛 이동, 건설 명령 등 명령 횟수를 늘려 경쟁국보다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기술연구 방식도 조금 다르다. ‘문명’으로 익숙한 트리식 연구 형식은 같지만 선택 방법에 차별점을 뒀다. 기술연구는 카드 뽑기로 진행한다. 카드 패 상단에 있는 카드 몇 장이 선택지로 제시된다. 연구카드 한 장을 고르면 나머지는 버림 패에 들어간다. 기술연구 후 ‘문명’ ‘유레카’와 비슷하게 특전이 주어지는데 획득 기간에 제한이 있다. 혜택을 누릴 것인지 테크를 탈 것인지는 플레이어의 선택이다. 한정된 시간 한정된 자원 그리고 현재 전략 구도 등을 고려해 제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전투할 때 자원을 활용해 턴이 끝난 유닛을 강제로 이동시킨다거나 장군 임명으로 변수를 만들 수 있는 모습에서 단순 턴제 전투의 단조로움을 보완한다. 다만 ‘고심하고 신중한 맛’이 조금 퇴색돼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무르기 기능도 존재한다.
이러한 요소는 보드게임이나 TCG 계열의 인스턴스 카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요즘 4X 게임이 보드게임을 차용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올드월드는 보드게임에 좀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본래 ‘문명’이 시드마이어가 보드게임 ‘문명’을 컴퓨터로 즐길 수 있게 턴제 전략게임으로 제작한 시리즈임을 고려하면 ‘문명’을 겉모습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계승한 듯한 느낌이다.
너무 보드게임처럼 보이려 했던 것인지 아쉬움도 있다. ‘문명’은 일종의 시뮬레이션으로 역사적인 사실을 재현한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 시대 문화 부흥 이벤트가 코에이의 ‘삼국지’처럼 어떤 특정조건을 충족했을 때 보여지는 게 아니라 기술의 발전, 인구수, 종교의 퍼진 정도, 문명 간의 애증 관계 등등 수치적 요소에 의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일종의 흐름을 보여주는데 반해 올드월드는 신화와 역사적 사건을 엮어 단순하게 표현한다. 그래서인지 네러티브를 제공하나 이야기 혹은 거시 흐름보다는 ‘타임라인 퀘스트’를 수행한다는 느낌이 든다.
올드월드의 승리목표는 전쟁으로 적을 점령하는 것만이 아니다.
외교적, 종교적, 문화적, 기술적 승리가 가능하다. ‘문명’과 차별점은 야망이다. 야망은 지도자의 희망 사항이다. 각 세력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움직인다. 일부 야망은 사망하고 후계자에게 이어진다. 야망을 달성하면 위신이 향상되고 야망 승리를 할 수 있다.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통치 도시를 성장시키면서 각종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가문 눈치를 봐야 한다. 정치 역학이 가미된 선택을 통해 세력을 확장해야 하므로 롤플레잉 향도 피어오른다. 덕분에 4X의 탈을 쓴 심즈와 같은 느낌도 난다.
역할놀이는 올드월드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계승권과 연결된다. 올드월드는 지도자가 죽었을 때 게임이 끝난다. 계승권을 확보하려면 국가 공주와 왕자를 국내 가문이나 다른 국가 혹은 부족의 일원과 결혼을 시켜야 한다. 실제 역사처럼 배우자의 가문, 국가, 부족과 관계로 인해 정세가 재설정된다.
가문과 후계자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게임 속에서 자식을 어떻게 키우는가에 따라 왕조의 미래가 달라진다. 인간사 다 그렇듯 계승자를 낳는다고 해서 권력 승계가 잘 이뤄지는 건 아니다. 아들이 뛰어난 전사지만 후계자로 삼기엔 너무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면 그의 충동적인 성격 때문에 전쟁 중 큰 화를 당한 후 동생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는 식이다.
그래서 잘 가르쳐야 한다. 좋은 특성을 가진 선생님을 붙여줘 성장시켜야 한다. 대치동이고 평촌이고 학원가가 그렇게 성행하는 걸 보면 이건 고대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온 인류 종특임이 틀림없다.
어찌저찌 똑똑한 자식을 만들었다 해도 아직 모른다. 내 자식의 숙부, 외조부, 고모는 물론이고 봉신, 타국가의 가문 등을 비롯해 내 부인마저 권력을 위해 내 뒤통수를 호시탐탐 노리기 때문이다.
이런 요소는 4X 게임과 의외로 궁합이 잘 맞았다. 4X 게임을 하며 소위 ‘뇌내망상’으로 몰입하는 플레이어라면 그 효과가 더 크다. 하지만 CK에 비하면 깊이가 얕아 가문 요소에 큰 기대를 가지고 플레이하면 실망할 수도 있다.
태생이 다른 올드월드의 가문요소를 CK와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는 무리지만서도 밀도가 낮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 주요 가문의 태도 차이만 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영향은 사치품이나 정책으로 균형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 여러모로 역사 속 위정자, 권력자, 왕족들이 겪었던 고심과 결정을 간접 체험하게 하지만, ‘한다’에 의의가 있을 뿐이다.
올드월드는 겉만 봤을 때 우려되는 게임이었다.
장점만 취하려다 특색 없이 잊혀지는 게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드월드는 적당히 잘 만든, 재미를 잘 풀어낸 게임이었다.
‘문명’과 비슷하지만 ‘문명’은 아니고, CK와 비슷하지만 CK도 아닌 게임. 그러나 이 두 요소를 합친 게임 중 올드월드를 대체할 대안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당신이 전략게임을 좋아하고 역사적인 모습을 다룬 게임을 좋아한다면 올드월드는 새로운 시간 여행의 매력을 선사할 것이라 확신한다.
게임 속에서 나의 선택과 실수는 하나의 대서사시로 기록된다. 영어로 하면 이런 감정을 느끼기 힘들 테니 스토브에서 한글판으로 하길 강력하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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