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일에 참견하는 게 제일 재미있다고 한다. 오죽하면 ‘저쪽 집이 무너졌다고 해서 구경하러 갔죠. 그런데 보고 오니 우리 집이 무너진 거예요. 보자마자 눈물이 났어요’ 라는 2012년 재난 상황 인터뷰를 아직까지 밈으로 쓸까.
옆집 부부 싸움, 회사 뒷담화, 미제 사건 유튜브까지 우리는 항상 ‘귀대기’를 한다. 문제는 현실에서 참견하면 신고 당한다는 거다. 그래서 게임이 있다. 게임 안에서는 캐물어도, 뒤져도, 심지어 남의 서랍을 열어봐도 아무도 경찰을 안 부른다.
7월호는 그렇게 참견하는 게임들로 묶었다. 남의 문서를 뒤져 초능력 사건을 캐는 소녀, 특급열차 안에서 옆 칸 승객의 알리바이를 캐묻는 세 사람, 5년 전 사라진 여자친구의 뒤를 다시 밟는 남자, 그리고 편의점 카운터 너머로 단골손님 사생활을 은근슬쩍 알아가는 대학생까지. 남의 일에 이렇게 진심이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파고든다. 죄책감은 없다. 게임이니까.
스테퍼 레트로: 초능력 추리 퀘스트
초능력이 실재하는 세계가 있다. 그 힘을 가능케 하는 물질의 이름은 '마나'다. 레트로샵에서 평범하게 살던 소녀 베리타는 어느 날 거액의 빚을 떠안는다. 보이스피싱도 아니고 코인도 아니고 레버리지도 아니다. 그냥 게임이 그렇게 시작한다.
빚을 갚을 방법은 하나, 초능력 도구 '스테프'를 판다. 그러려면 그 물건이 과거에 무슨 사건을 일으켰는지부터 캐내야 한다. 세상에서 제일 서글픈 창업 스토리다. 자본금 대신 빚을 안고, 사업 아이템 대신 아이템의 과거를 캐내며 시작한다.
스테퍼 시리즈는 문서로 말한다. 대화를 나누고 자료를 모으고, 종이 위에 흩어진 단서를 조합해 결론에 닿는다. 은행 대출받는 느낌으로 서류를 파고들면 된다. 6종류의 문서 곳곳에 이야기 조각이 숨어 있다. 전부 찾아 모으면 표면 아래 감춰졌던 진실이 드러난다.
팀 테트라포드는 스테퍼 시리즈로 추리 게임 전문 개발사임을 표방한다. 스테퍼 시리즈는 2023년과 2024년 스토브 인디상을 연달아 수상했다. 이번 신작 역시 그 계보를 잇는다.
캐릭터 전원에 전문 성우 음성을 입혔고, 스파인 애니메이션을 씌워 움직임까지 살렸다.
빚쟁이 소녀의 사정은 딱하지만, 덕분에 우리는 좋은 추리게임 하나를 얻었다.

로코 모티브: 로이스 특급 살인
애거사 크리스티는 오리엔트 특급열차에 살인을 태웠다. 로코 모티브는 그 열차를 로이스 특급으로 바꾸고, 근엄함은 승강장에 버려두고 왔다. 대신 슬랩스틱을 가득 실었다.
부유한 상속녀의 연설을 앞둔 밤, 승객 한 명이 살해당한다. 용의자는 하필 주인공 셋이다. 억울한데 일단 도망갈 곳도 없다.
플레이어는 변호사, 범죄소설가 출신 신참 형사, 정체를 숨긴 스파이를 오간다. 저마다 다른 시선으로 같은 열차를 훑고, 같은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캐묻는다. 직업만 보면 다들 탐정 자격은 충분한데 서로를 제일 먼저 의심한다. 세 사람의 진술이 어긋나는 지점에서 진실이 나온다.
퍼즐 난이도는 몇 시간씩 머리를 붙잡을 필요는 없는 수준이다. 대신 도트 그래픽과 풀 더빙, 촘촘한 개그가 그 자리를 채운다. 막히면 힌트를 주는 핫라인도 준비돼 있으니 밀실 안에서 혼자 좌절할 일은 없다.
마치 한 편의 추리 애니메이션을 정주행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Coarctari
고등학교 졸업 연극을 준비하던 메디슨이 사라졌다. 5년이 지났다. 야구선수를 꿈꾸던 남자친구 리엄은 그녀가 사라진 뒤 조명이 떨어지는 사고를 겪었다. 꿈을 접고 지금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산다.
그러던 어느 날 리엄은 그녀를 봤다는 제보 하나를 붙들고 폐교나 다름없는 학교를 다시 찾는다. 5년이면 웬만한 미련은 삭는다는데, 이 남자는 아니다.
Coarctari는 비주얼노벨과 쯔꾸르 감성을 섞은 1인 개발 공포 게임이다. 텅 빈 복도, 이상한 인기척, 설명 안 되는 불안. 리엄은 그 안에서 악의로 가득 찬 존재들과 마주한다. Free BGM으로 귀를 채웠지만 어색하지 않다. 개발자의 공이 보이는 대목이다.
플레이타임은 100분이 채 되지 않지만 엔딩은 멀티 엔딩이다. 무려 5개다. 배드엔딩 3개, 노멀엔딩 1개, 진엔딩 1개다. 선택지와 추격전 결과에 따라 9가지 게임 오버 상황이 발생한다. 9가지 모두 고유한 연출을 보여준다.
Coarctari는 라틴어다. 직역하면 '제약하다', '압박하다', 혹은 '감금하다'라는 뜻이다. 게임 속에서 중의적으로 쓰인다. 리엄의 여자친구 메디슨이 준비하던 연극의 제목이자 멀티엔딩의 소재다.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질 수 있을까." 게임이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다. 실종 사건의 진상보다 이 질문이 더 오래 남을지도 모른다. 구원받지 못한 희생은 가장 아름다운 저주가 되었다는 문구 역시 , 플레이하고 나면 무슨 뜻인지 알게 된다.

인콘비니 (inKONBINI: One Store. Many Stories)
손님의 표정 하나, 매번 사가는 물건 하나도 참견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인콘비니는 그 참견을 편의점 카운터 위로 옮겨 놓았다. 인간관계와 일상의 순간을 중심으로 한 아늑한 서사 게임을 표방한다.
무대는 1990년대 초 일본, 시간은 여름방학이다. 플레이어는 대학생 하야카와 마코토가 되어 작은 마을 편의점을 지킨다. 선반을 채우고 진열대를 정리하고 손님을 맞는다.
일과 사이사이 단골들과 대화가 쌓인다. 분기하는 선택지를 따라가다 보면 무심코 스쳐 지나갔을 이웃들의 사정이 하나씩 드러난다. 누군가의 비밀은 상품 진열대 뒤에서, 혹은 계산대 너머 짧은 대화 속에서 조용히 새어 나온다. 편의점 알바는 원래 동네 정보통이다. 이 게임이 그걸 증명한다.
가차폰에서 캡슐 토이를 뽑는 재미부터 ASMR에 가까운 매장 소음까지 세심하다. 향수를 자극하는 조명과 디테일 속에서 플레이어는 어느새 카운터 안쪽 탐정이 되어 있다. 대단한 사건은 없다. 그러나 사람 사는 이야기치고 시시한 것은 없다.
여름방학 알바 하나 뛰었을 뿐인데 동네에 대해 소설 한 권 쓸 분량을 알게 된다. 미용실에 모여있던 아주머니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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