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브인디 게임 추천 l 반복을 자처하는 게임 2026-09-30

노동은 원래 형벌이었다. 창세기에서 신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선고한다.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 낙원에서 쫓겨난 값이 노동이었다.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는 한술 더 뜬다. 신들을 속인 죄로 영원히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 올려야 한다. 정상에 닿는 순간 바위는 굴러 떨어진다. 끝이 없다. 그런데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한 형벌 앞에서 뜻밖의 결론을 내렸다. “시지프는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노동은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할 만한 것이라는 말이다. 즉 우리가 월요병 같은 노동으로 인한 병을 없애려면 일요일에도 일하며 행복해지면 된다. 그리고 게임 안 노동은 일요일에도 할 수 있다. 더구나 행복하다.


유리창은 다시 더러워지고, 몬스터는 웨이브마다 다시 몰려와도, 지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반복을 자청해서, 심지어 돈까지 내고 한다. 


9월호는 반복을 자처하는 게임들을 모았다. 유리창을 닦는 자, 하늘 위에 도시를 세우는 자, 마법진을 그리는 자, 바이러스를 막아서는 자. 노동이 어떻게 오락이 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닦은 만큼 통장에 찍히고, 지은 만큼 데이터가 남는다.


스카이 더 스크레이퍼(SKY THE SCRAPER)


닦는 노동부터 보자. 유리창은 시지프의 바위와 같다. 오늘 다 닦아도 내일이면 다시 더러워진다. 아내가 주말마다 시켜서 닦아도 다음 주면 또 그 꼴이다.


‘스카이 더 스크레이퍼’의 주인공 스카이는 고층빌딩 외벽에 매달려 매일 창문을 닦는 청소부다. 문제는 이 사람이 해야 할 게 유리창 청소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게임은 고층빌딩 외벽 청소 액션에 청춘 라이프 시뮬레이션을 얹었다. 세금, 방 월세, 생활비, 의료비 같은 고정지출을 감당하며 멘탈과 체력까지 관리해야 한다. 불안정한 꿈을 좇는 청년의 이야기 답게, 유리창은 그럭저럭 닦이는데 인생은 좀처럼 닦이지 않는다.


외벽 닦는 게임인 줄 알고 접근했다가 인생관리를 하는 게임이 된다.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보니, 일하기 싫으면 결근해버릴 수도 있다. 다만 그 대가가 마이너스 통장일 뿐이다. 대출 마통이 아니라 진짜 마이너스다.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시지프도 이 정도로 팍팍하진 않았을 것이다.


스토브 한글화로 출시했다. 오직 스토브에서만 한글로 즐길 수 있다.


스카이 더 스크레이퍼.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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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드 드웰러스(Cloud Dwellers)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노동과 작업을 구분했다. 노동은 소비되고 사라지지만, 작업은 세계에 흔적을 남긴다. 밥을 지으면 그 밥은 먹는 순간 사라진다. 그게 노동이다. 집을 지으면 그 집은 대를 물려 남는다. 그게 부동산이다. 아니 작업이다. 


‘클라우드 드웰러스’가 하는 일은 후자다. 공중에 떠다니는 섬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도시를 세우는 건설 시뮬레이션이다. 자원을 캐고, 건물을 올리고, 정착지를 넓힌다. 오늘 지은 탑은 내일도 그 자리에 남는다. 심지어 모레도, 글피도 남는다. 


이 게임은 압박이 없다. 마을이 갑자기 전멸하지도 않는다. 굶어 죽지도, 얼어 죽지도 않는다. 그냥 하늘 위에서 조용히 집이나 짓고 있으면 된다. 스트레스는 오직 나 자신의 미적 감각에서만 온다. 꾸미기에는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는 정도가 이 게임에서 겪을 수 있는 최대 위기다.


그래도 2D 그래픽과 만화책 한 페이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감성은 이 게임을 힐링물 반열에 올려놓는다.  ‘오늘도 뭔가 하나 완성했다’는 뿌듯함도 준다.


클라우드 드웰러스.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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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매거스 서클(The Magus Circle)


마우스로 뭔가를 그려보라고 하면 대부분 그림 실력이 초등학교 미술시간 수준으로 돌아간다. 원 하나 제대로 못 그리고, 직선은 다 삐뚤삐뚤하다. '더 매거스 서클'은 그런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준다. 


마우스로 마법진을 그려 주문을 발동하는 드로잉 로그라이크다. 그림 한 장 한 장이 반복되는 노동이자 동시에 숙련이다.


다행히 이 게임엔 미술 점수라는 게 없다. 대충 그려도 마법은 나간다. 위대한 마법사가 되는 데 필요한 건 그림 실력이 아니라 타이밍과 각도, 그리고 어느 정도의 배짱이다.


캐릭터별로 다른 스토리가 진행되고, 난이도까지 직접 골라 도전할 수 있는 챌린지 시스템 덕분에 재미의 강도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 업그레이드 조합만 250종이 넘어서, 마법진을 그릴 때마다 다른 빌드 전략이 나온다. 그리다 보면 손이 먼저 안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다.


어떤 플랫폼보다 스토브에서 가장 빠르게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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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소녀(Anti-Virus Girl)


내 컴퓨터를 지켜주는 백신 프로그램이 미소녀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부분 알록달록한 방패 아이콘이거나, 갑자기 실시간 검사를 시작하면서 리소스를 몰래 먹다 못해 퍼먹는 프로그램이었다. 은행 사이트라도 들어갈라 치면 백신이 아니라 멀웨어 같았다. 


'백신소녀'는 이 무뚝뚝한 관계를 통째로 갈아엎었다. 백신이 미소녀의 모습으로 나타나 내 컴퓨터를 지켜준다는 설정이다. 이제 실시간 검사 알림이 떠도 조금은 덜 짜증난다. 2D 여성에는 관심이 없던 이들도 인정할 거다. 그래 다 이렇게 시작하는 거다.


컴퓨터 바이러스, 삭제, 악성코드 같은 익숙한 소재를 캐릭터화해서 친숙도도 높다. 첫인상은 영락없이 귀여운 미소녀 게임이라 다들 가벼운 마음으로 켰다가, 얼마 안 가 표정이 진지해진다. 실제로는 생각보다 어렵고 전략적인 타워디펜스이기 때문이다. 방어선을 짜는 손은 매섭고 화면은 사랑스럽다. 귀여움에 낚였다가 난이도에 발등 찍힌다.


컴퓨터를 켤 때마다 미소녀가 나와서 바이러스를 대신 잡아준다면, 실제 백신 프로그램 검사 알림도 반가울 것 같다. 카뮈 말마따나, 우리는 이 반복 앞에서도 행복하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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