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한국적 소재를 풀어낸 게임이 많았다. 멀게는 '단군의 땅'부터 여전히 멀긴 하지만 '임진록', ‘충무공전’ '퇴마전설', '조선협객전', '바람의나라', '천하제일상 거상', ‘군주’, '탈'까지. 역사와 대체역사, 신화와 설화를 밑천 삼은 작품이 심심찮게 나왔다. 2000년대, 우리 문화를 새로 발견하던 시대상을 감안해도 많은 편이었다.
배경에 우리네 모습과 감성을 깔아둔 게임으로 범위를 넓히면 목록은 더 길어진다. '다크사이드 스토리',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신혼일기', '캠퍼스러브스토리', '하얀마음 백구', '화이트데이', '보아 인 더 월드'. 언뜻 떠올려도 줄줄 나올 만큼 장르와 소재가 넓었다.
최근에도 시도는 있다. '산나비', '검은사막 아침의 나라', 'BTS 월드'가 나왔고, 4.3사건을 다룬 '언폴디드'와 'MazM: 페치카', 논란을 일으킨 '웬즈데이'처럼 근현대사에 손을 댄 작품도 보인다. 다만 그 수는 다른 장르에 비하면 초라하다.
'무사: 더티페이트', '탈: 디 아케인 랜드', '우치 더 웨이페어러', '신더시티'가 개발 중이니 명맥이 끊겼다고는 못 하겠다. 그러나 '킹덤 컴', '위쳐', '디스 워 오브 마인', '신장의 야망', '검은 신화: 오공', '닌자 가이덴'처럼 자국의 소프트파워를 통째로 끌어다 쓴 거대 작품이 우리에겐 없다. 아쉬운 대목이다.

국내 RTS의 효시격인 충무공전
일단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줄 게임들이 스토브에 있다. 역시 생태계는 스토브가 만든다.
'임진왜란: 이순신의 역습(데모)', '눈 떠보니 임진왜란이었다', '남가람(데모)', 'SGS 한국전쟁' 같은 우리 역사 소재 게임이 있다. '한국철도 운전여행', '포장마차: 한국 길거리 음식 경영 시뮬레이터', '하숙생이 전부 미녀입니다만?'처럼 우리 감성을 듬뿍 담은 게임도 찾아볼 수 있다.
'눈 떠보니 임진왜란이었다'는 교통사고를 당한 주인공이 눈을 떠 보니 이순신 장군의 병사가 되어 있었다는 설정의 액션게임이다. 검을 8방향으로 휘두르고 찌른다. 상대의 검을 막고, 피하고, 벤다. 검술 본연의 재미를 담았다.
'SGS 한국전쟁'은 한국전쟁을 다룬 대전략 게임이다. 과거에는 한국전쟁을 다뤘다는 이유만으로 심의를 통과하지 못해 국내 유통이 막혔다. 이제는 스토브에서 이런 게임을 즐긴다. 격세지감이다.

보면 알겠지만 유명하지 않은 인디게임이다. 진정성 있게 인디게임을 지원하고 생태계를 넓히려는 스토브의 성격 탓도 있지만, 근본 원인은 따로 있다. 한국 역사와 문화를 소재로 한 대작 게임이 실제로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스토브에서 게임을 즐겨보면서 왜 한국의 것을 기반으로 한 게임이 나오지 못했는지 알아보자.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을 견디며 만들어야 하는 소재
요인은 복합적이다. 추리자면 노력의 부족, 기록의 부족 등이 있다.
과거에는 내수 시장의 한계를 이유로 들었다. 내수가 작아 상업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한국사가, 한국 문화가 해외에서 매력이 떨어진다는 분석도 곁들였다. 하지만 넷플릭스 '킹덤' 등이 세계적으로 흥행했다. 갓과 김밥이 유행했고, 우리 대중조차 잘 모르던 '까치호랑이(작호도)'가 해외에서 입소문을 탔다. 게다가 한국은 세계 4위의 게임 콘텐츠 소비국이다. 시장은 결코 작지 않다. 오히려 준비된 셈이다.

일각에서는 일본과 비교해 한국사의 대중화와 캐릭터화 노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한다. 일본은 사무라이, 닌자, 가라테를 캐릭터로 빚어 세계에 뿌렸다. 관련 게임만 수백 개다. 그러다 보니 '고스트 오브 쓰시마' 같은 AAA급 게임을 서구 회사가 만드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우리는 그 노력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우리의 문화의 다양한 요소를 알리기 시작한지 몇 해 되지 않았다.
고증의 무게도 크게 다가온다. 일제 식민지배를 겪은 한국은 역사 왜곡을 막기 위해 정통성과 고증을 강조했다. 사극조차 늘 고증 논란에 시달린다. 판타지와 픽션을 섞어야 하는 게임으로서는 한국사가 만만한 소재일 수 없다.
역사 자료에 대한 접근도 어렵다. 기록의 민족이라 불리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맞다. 우리는 기록의 민족이다. 다만 남은 기록이 조선에 쏠려 있다.
고대사는 기록이 부족하다. 살수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을 거둔 을지문덕의 기록은 사실상 전무하다. 대중에게 양만춘으로 알려진 안시성주는 이름조차 확실치 않다. 여기에 재야에서는 중국 사료와 교차 검증을 거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마저 잘못된 검증이라며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환단고기 같은 논쟁적인 문제도 남아 있다.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3번함 ‘양만춘’. 하지만 안시성주의 정확한 본명은 현존하는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 고려사는 남아있느냐. 아니다. 고려실록은 임진왜란 중 불탔다. 오늘날 고려의 역사에 대한 국가적 주 기록은 고려실록을 핵심 바탕으로 삼아 김종서 등을 중심으로 편찬한 ‘고려사’, 그리고 여기서 요점만을 뽑아 편년체로 엮은 ‘고려사절요’에 전적으로 기댄다.
그렇다고 기록이 풍부한 조선사를 끌어다 쓰자니 이번엔 종친회가 마음에 걸린다. '조선구마사', '김수로', '명량', '공주의 남자'. 역사를 소재로 한 영상 콘텐츠가 줄줄이 종친회와의 송사에 휘말렸다. 상상력이 개입하는 순간, 게임 소식보다 법정 소식이 더 자주 들려올 판이다.
좋은 취지로 만든 역사 소재 게임이라도 안전하지 않다. 완성도가 떨어지거나, 현대의 사건사고와 엮이거나, 고증이 어긋나면 폐업 수순을 밟을 위험까지 안는다.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웬즈데이'가 그랬다. 기대에 못 미친 게임 품질에, 자문 과정의 논란으로 제작사 게임브릿지는 결국 문을 닫았다.
결과적으로 선택지는 하나만 남는다. 적잖은 상상력을 동원하되, 역사적 논란이 적고, 후손이 싫어하지 않으며, 한국인이 호감을 느낄 인물. 게임은 그 좁은 틈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킹덤 컴'이 창작 인물 헨리를 후스전쟁의 한복판에 던져 넣었듯, '어쌔신 크리드'가 시대 배경만 빌려 상상력을 풀어놓았듯 우회로는 있다. 그러나 개발자 입장에서 이 어려움을 굳이 이겨내며 게임을 내느니, 용이 불을 뿜고 마왕이 "크아아아악" 하는 세계관을 짜는 편이 훨씬 쉽다.
우리 역사, 문화를 다루기엔 정책적 유인도 부족한 편이다. 게임인재단의 '게임인 한국사 나눔 프로그램'(사료·자문 제공)과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제작지원 공모 정도다. 앞서 말한 소프트파워를 끌어다 쓰기 힘든 상황이 겹치니 거대 게임이 나올 수 없는 구조일 수 밖에 없다.
반면 유럽은 EU의 기능조약에 따라 '문화와 유산 보존을 촉진하기 위한 지원'을 국가보조금 금지 원칙의 예외로 인정한다. 회원국이 자국 문화를 담은 콘텐츠에 세금을 깎아주고 보조금을 얹어도, 시장 왜곡이 아니라 문화 보존으로 본다.
영국은 2014년 창조산업 세제 혜택의 하나로 비디오게임 세액공제(Video Games Tax Relief, VGTR)를 했다. 게임의 배경이 영국인지, 주요 캐릭터가 영국인인지, 스토리가 영국적 소재에 기반하는지, 대사가 영어인지를 따져 지원 대상을 선정한다.
사실 캐나다와 프랑스가 먼저 세제 혜택으로 유비소프트 같은 대형 개발사의 스튜디오를 유치한 것을 보고, 영국이 뒤따라 만든 제도이긴 하지만 어쨌든 '영국다운 게임'을 만들도록 장려한다.

프랑스에서 제작한 ‘33원정대’ 속 무기. 바게트
프랑스는 2008년 비디오게임 세액공제(Crédit d'Impôt Jeu Vidéo, CIJV)를 도입해 비주얼·내러티브·음악의 독창성, 기술 혁신성과 함께 프랑스 유산(French heritage)을 조명하는 게임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폴란드는 '위쳐'로 게임을 국가 브랜드로 만든 나라답게, '비디오게임은 이용자에게 문화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온전한 매체'라고 게임을 문화 매체로 법에 못 박았다. 이들은 ▲폴란드 또는 유럽 문화유산에 기반할 것 ▲문화 형성적이거나 혁신적일 것 ▲폴란드 영토에서 제작할 것 을 기준으로 게임에 폴란드 색을 입히도록 노력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전 세계가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는 지금이 한국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게임으로 선보일 최적의 타이밍"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제도가 뒷받침된다면 우리도 더욱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와 상황이 비슷한 인도와 대만의 약진
게임 산업에서 인도의 역사적 역할은 주로 막후에서 이루어졌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기술적 재능을 깊이 보유하고 있으며, 대형 서구 개발사들을 위해 계약 작업과 외주를 처리하는 수많은 스튜디오를 보유했다.
환경도 비슷하다. 인도 게임 시장은 2025년 기준 50억 달러 규모로 평가받는다. 시장과 기술이 있다. 관건은 둘이었다. 오리지널 개발 역량과 인프라가 따라붙을 수 있는가, 인도에서 나온 게임이 내수를 넘어 세계로 뻗을 수 있는가 였다.
최근들어 인도 크리에이티브가 주도한 오리지널 게임들이 두 질문에 모두 "그렇다"고 답하기 시작했다.

푸네(Pune)에 기반을 둔 소규모 스튜디오인 노딩 헤즈 게임즈는 데뷔작인 ‘Raji: An Ancient Epic’으로 2020년 ‘더 게임 어워드’에서 Best Debut Game 후보에 올랐다. 인도 게임 최초였다.
힌두 신화와 파하리(Pahari) 회화의 시각 언어에서 영감을 얻어, 빠른 템포의 전투와 인도 전통 예술의 이미지를 하나로 엮었다.
아옐렛 스튜디오는 ‘Son of Thanjai’라는 시네마틱 액션 어드벤처를 만들었다. 11세기 촐라(Chola) 제국을 배경으로 드라비다 전통에 뿌리를 둔다. 출시 전인데도 공개하자마자 국제적 관심을 끌었다. 설정과 비주얼의 방향이 서구나 일본 스튜디오가 만들 법한 것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대만은 공포 장르에서 빠르게 명성을 쌓았다. 레드 캔들 게임즈는 'Detention(반교)', 'Devotion(환원)', 그리고 'Nine Sols'로 대만에 TSMC 말고도 세계가 주목하는 스튜디오가 있음을 알렸다. ‘Nine Sols'는 도교 신화와 공상과학을 접붙인 세계관 위에 수작업으로 그려낸 유연한 액션을 얹었다.
에스토니아의 ZA/UM도 빼놓을 수 없다. '디스코 엘리시움'으로 세계적 스튜디오가 됐지만, 그 창작 감성의 뿌리는 에스토니아 문화에 단단히 박혀 있다.

문명7에서 등장한 ‘조선’ 문명
최근 산업계의 흐름은 분명하다. 자국의 문화와 역사에서 영감을 길어 올리고, 좋은 이야기로 승부한다. 그것이 곧 차별화가 되고, 브랜드가 된다.
'콜 오브 듀티', '발키리 프로파일', '어쌔신 크리드', '갓 오브 워', '고스트 오브 쓰시마'가 보여주듯, 자국 개발사가 아니어도 남의 나라 소재로 게임을 만든다. 다만 조건이 있다. 그 소재가 이미 강력한 소프트파워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소프트파워는 자국에서 끊임없는 시도가 쌓여야 만들어진다.
사무라이 게임 수백 개가 있었기에 '고스트 오브 쓰시마'가 나왔다. 조선의 검객이 세계 무대에 서려면, 먼저 우리 안에서 칼을 뽑는 게임이 계속 나와야 한다.
지금은 그런 게임이 드물다. 스토브에서 만날 수 있는 작은 게임들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스토브가 선도해 창작 생태계가 커지고 다양성이 생기면 곧 우리의 소재에 기반을 둔 게임들을 다수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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