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꽃이 폈다. 개나리는 만개했고 벚꽃도 흐드러지다 못해 철쭉에게 대권을 넘겨주고 있다. 전국의 온갖 제방과 동산에서는 꽃축제가 열린다.
평일에는 안 피곤한 척 끌려나가고 주말에는 즐거운 척 꽃놀이에 끌려나가야 한다. 게임을 못 한다. 지옥이다. 솔로도 안전하지 않다. 어차피 떨어질 꽃 빨리 떨어지라고 기우제라도 지낼라 치면 하하호호 꽁냥꽁냥 다니는 커플을 보면서 싱숭생숭하다 못해 뚝딱거린다. 가슴이 아리다. 언젠가 노래 부르는 아는 형이 그랬다. 봄이 좋냐고. 꽃잎도 떨어지고 너네도 떨어진다고. 근데 안 떨어지더라…
거봐 떨어지면 다 쓰레기야
지옥의 꽃놀이 시즌을 보내고 나면 다시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온다. 그러나 선뜻하던 게임에는 손이 안 간다. 무거운 게임은 너무 오래 쉬어서 다시 하기 껄끄럽다. 새로운 게임을 하자니 부담스럽다. 이런 ‘느낌적인 느낌’이 온다.
이 때부터 시작이다. 뭔 게임을 하든 재미가 없어서 새 게임을 찾는다. 무슨 유행처럼 너도 겪고 나도 겪는다. 봄날 꽃놀이 가는 여자친구가 켜켜이 쌓인 옷 앞에서 “옷이 없넹...”하는 것처럼 게임이 수백 개 있는데 막상 하고 싶은 게임이 없어 라이브러리만 뒤적거린다.
스팀덱이든 플스든 엑박이든 스위치든 맥이든… 가득가득 게임이 있어도 하고 싶은 게 없다
봄에는 원래 다 그렇다. 봄시즌은 여가를 두고 다투는 모든 콘텐츠 이용자가 빠져나가는 시기다. 신학기 말랑말랑 새 연애와 야외활동이 늘어나는 영향이다. 명로진 연세대학교 공학대학원 겸임교수가 쓴 ‘방송이 신통방통’에 따르면 최고 기온이 1도 상승하면 시청률이 0.378%가 떨어지고 맑은 날은 비 오는 날보다 시청률이 3~4% 낮다고 한다. 한국 방송사들이 봄과 가을 두 차례 방송개편을 하는 이유도 4월부터 반 년간 시청률이 10월부터 반년간 시청률보다 낮기 때문이다.
결국 봄 꽃구경이 안분한 게임 생활을 망치는 주범이다. “우리 모두 봄 꽃놀이 같은 거 하지 말고 집에서 게임이나 하자”는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피는 꽃을 말릴 수 없고 따뜻한 날씨에 마음마저 녹아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시즌에 게임만 하기에는 나대는 심장을 제어할 길이 없다.
위와 같은 증상을 ‘게임 불감증’이라고 부른다. 게임 불감증은 게임을 아예 구동하지 않거나 새로운 게임을 시작해도 흥미를 곧 잃거나 피곤함을 느껴 게임을 봉인해버리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증상을 뜻한다.
격하게 아무 게임도 열심히 하고 싶지 않다.
정식 의학용어는 아니다. 그래도 민간에 널리 퍼져 있고, 통용되기 때문에 민간 디지털 증상이라고는 볼 수 있겠다. 정식 의학용어인 불감증과는 ‘느낌적인 느낌’으로 상통하는 관계다. ‘안전 불감증’처럼 익숙해져서 별다른 느낌이 느끼지 못한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당연히 임상기준이나 진단기준이 없다. 국제질병분류(ICD)를 뒤져봐도 통계청에 물어봐도 알 방법이 없다. 내가 물어봤다. 대답하는 통계청 사무관의 목소리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따라서 증상도 우리의 경험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게임 불감증 증상은 다음과 같다. 새로운 게임을 찾는데 시간을 대부분 소비한다. 스팀 할인도 기웃거리고 콘솔 스토어 할인도 기웃거린다. 괜히 평가를 한 번씩 찾아보고 메타크리틱에도 들어가본다. 다른 사람들이 플레이한 영상을 보기도 한다. 그렇게 사 놓고 인스톨도 안 한다. 기억이나 하면 다행이다. 나중에 할인할 때 사려고 보면 이미 라이브러리에 있는 게임인 경우도 생긴다.
으어어 할 게임이 없다고 없다고…
새로운 게임을 즐기려고 해도 1시간도 채 즐기지 못한다. 평소에 재밌던 게임에 손이 안가는 건 기본이요, 새로운 게임을 조금 하다가 꺼버린다. ‘습관적으로’ 게임을 하려고 하지만 즐거움이 아닌 스트레스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이쪽은 낫다. 인스톨이라도 했으니.
더 나쁜 건 게임 실력이 퇴화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집중이 안돼서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버리는 경험이다. ‘게임은 하고 싶은데 막상 하려면 의욕이 없다’라는 생각에서 시작해 온갖 부정적인 경험으로 발전한다. 심할 경우 게임과 관련된 흥미가 완전히 사라지는 일도 있다. 게임으로 유발되는 스트레스가 게임이 주는 즐거움 보다 커지기 때문이다.
보통 게임 불감증은 엄청 재미있게 즐겼던 게임을 오래 즐기며 골수까지 빨아먹으며 끝냈을 때, 게임 타이틀이 너무 많아서 뭘 해야 할지 모를 때, 너무 많은 게임을 숙제로 해야 할 때, AAA급 게임 범람 속에서 가볍게 즐길 만한 거리가 없을 때, 한꺼번에 많은 게임을 동시에 진행해 일처럼 해야 할 때,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봄날 싱숭생숭해서 싸 돌아다니다가 게임을 안 해서 게임에 다시 진입하기에 어려울 때 생기고는 한다.
그냥 바빠서 게임 불감증이 오기도 한다. 바쁘다 보니 게임보다는 휴식을 취하고 싶은 거다. 나이 들면서 피부로 아니 갑각으로 느끼고 있다. 패드들 힘도 없다는 걸. 사실 나이를 먹으면 게임에서 멀어지는 게 당연하다. 예전이랑 달리 눈과 손의 협응도가 떨어지는 데다 순발력도 예전 같지 않다. 거기에 두어 시간만 앉아있어도 몸이 뻐근한 경험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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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전체를 단축키로 쓰고 조합키까지 썼었는데, 이젠 QWER 이상 넘어가면 손가락이 꼬인다
불감증을 이겨내는 데는 이른바 컨셉질이 도움이 된다. 미니맵을 보지 않고 게임을 한다거나 자체적으로 제한을 걸고 플레이하는 방식이다. 자체 하드코어 모드로 진행하거나 ‘FM’할 때 양복을 입는다거나, ‘엘든링’에서 한 번 죽을 때마다 1000원씩 기부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다. 정 안되면 몰래 해봐도 좋다. 세상에 몰래 하면 다 재밌다. 자격증 시험을 준비해도 좋다. 시험날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하는 게임은 없던 재미도 만든다.
가장 좋은 해결법은 게임 대신 다른 취미생활을 찾는 거다. 다른 취미생활을 하면서 다시 게임에 대한 향수를 느껴서 돌아갈 때까지 잠시만 안녕인 거다. 기천만원짜리 자전거에 싸이클 컴퓨터 얹혀 놓고 트레이닝하고 있으면 ‘뚜르 드 프랑스’ 게임이 생각난다. 온갖 장비를 다 구입하고 아이스하키를 할 때면 ‘NHL시리즈’가 생각난다. “왜 내 몸뚱아리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가”라는 자괴감이 드는 건 피할 수 없다. 그 뿐인가? 축구를 보러 가면 ‘FM시리즈’가 생각나고 분실물 센터에 가면 ‘로스트 저지먼트’가 생각나고 막 그런다.
어쨌든 게임에서 멀어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겜돌이에게는 정체성을 잃어야 하는 중대한 문제다. 온라인게임은 잠깐 접으면 그만큼 일퀘보상을 받지 못하고 경쟁에서 뒤떨어지는 느낌도 받을 수 있다. 심하면 바로 ‘탈주각’ 나오는 거다.
취미는 더 이상 지를게 없을 때 멈춘다지만 게임은 질러도 지를 게 생긴다… 그래서 내 자전거는 멈췄다.
뭔 이런 이상한 소리를 길게도 써 놓나 싶겠다. 이해해 달라. 봄이잖나. 싱숭생숭해서 기우제라도 올리고 싶은데 못해서 그런다. 누군가는 히스테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더라. 아무튼.
봄 시즌 게임불감증 유행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토록 많은 원인과 해결법이 민간에 통용되고 있다는 건 그만큼 겪는 사람이 많다는 방증이다. 실제로도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제외한 지난 5년간 국내 주요게임사 2분기 매출은 1분기 매출과 비교하면 30%가량 낮았다.
문제가 되는 건 할 게임이 없으니 자꾸 밖으로 나가서 안 돌아온다는 것이다. 게임산업 경쟁상대는 더는 게임산업 내부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같이 시간을 두고 경쟁하는 흥행산업, 더 크게 범주를 잡으면 모든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대중의 한정된 여가를 두고 싸워야 한다. 더구나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처럼 로봇이 모든 잡일과 이동을 대신해주는 세상이 오지 않는 한 여가로 허락된 시간은 내가 폐사할 때까지 드라마틱하게 늘어날 것 같지 않은 상황이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카라라도 있지 않는 한 여가 시간이 갑자기 늘지는 않을 것이다.
20여년 전 “나이키 경쟁자는 아디다스, 리복이 아닌 닌텐도”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제는 반대로 게임에도 “게임의 경쟁자는 드라마, 영화, 프로스포츠, 생활체육”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게임 산업이, 시장이 크게 성장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경쟁이 더 치열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게임을 만들고 팔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곤혹스럽다. 게임 내부 요인보다 게이머 자체에게 요인이 있으니 이를 예상하기도, 회피하기도 어렵다. 게임 불감증의 결말 중 하나가 게임 이탈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게임 불감증은 위험한 존재다. 고객 생애 가치(LTV), 투자 대비 수익(ROI)를 정확히 계산해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을 하는 현재 게임산업 구조에서 이용자 이탈을 막는 것이 신규 이용자를 유입시키는 것보다 효율적임은 두말할 나위 없기 때문이다.
게임은 다른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비해 불리한 점을 안고 있다. 한 번 떠난 이용자를 다시 불러오는 게 다른 엔터테인먼트 산업보다 어렵고 비싸기 때문이다. 시간을 두고 싸워야 하는 산업에서 엄청난 약점이다.
결국 봄의 이 유행병에 맞서기 위해서는 고도화된 이탈 예측 모델링을 수립하거나 이탈하지 않게 강약을 조절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운영 경험과 데이터를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향후에는 게임 개발만큼이나 게임사의 중요한 역량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게임불감증을 겪은 동네형은 ‘페르시아의 왕자’를 다시 해보고 몇 십년만에 엔딩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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