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인류가 이야기로 빚어낸 가장 오래된 소재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그랬고, 중세의 무훈시가 그랬고,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그랬다.
요한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에서 전쟁과 놀이가 한 뿌리에서 자랐다고 주장했다. 규칙이 있고, 승자와 패자가 나뉘며, 명예가 걸린다는 점에서 둘은 닮았다. 인간이 가장 먼저 만든 의례가 장례였다면, 그다음은 모의 전투였을 것이다. 그러니 게임이 전쟁을 즐겨 다루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전쟁을 이야기로 만들어 왔고, 이야기는 결국 놀이가 된다.
미디어의 영토는 구술과 활자에서 영화로, 다시 게임으로 넓어져 왔다. 매체마다 전쟁을 다루는 문법이 다르다. 소설은 내면을 파고들고, 영화는 이미지로 압도하며, 게임은 플레이어 손에 방아쇠를 쥐여준다.
바로 이 점이 게임을 이전 어떤 매체보다 위험하면서도 정직한 매체로 만든다. 플레이어는 구경꾼이 아니라 가담자다. 영웅이 되는 것도, 민간인을 죽이는 것도, 폐허를 지나가는 것도 결국 내 손이다. 이 가담의 구조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같은 전쟁이 어떤 게임에서는 쾌감이 되고, 다른 게임에서는 증언이 되며, 또 다른 게임에서는 철학적 질문이 된다.
게임이 다루는 전쟁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도시를 허물고 가족을 흩고 한 세대의 기억을 트라우마로 뒤덮은 현실을 담기도 하고, 같은 전쟁을 영웅담으로 각색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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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웅의 총구 — 영웅담으로서의 전쟁
영웅 서사를 가장 잘 활용한 게임은 단연 '콜 오브 듀티' 시리즈다. 1인칭 시점과 극도로 응축된 연출, 직선적 레벨 디자인으로 영웅담을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1인칭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하다. 그 어떤 매체도 전쟁을 1인칭으로 체험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전쟁 게임은 스토브에서 만날 수 있는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3'나 '코만도스' 같은 몇몇 예외를 빼면, 대개 전쟁 영웅의 서사와 경험을 중심에 둔 FPS를 표방하게 된다.
물론 '콜 오브 듀티' 이전에도 1인칭 게임은 있었다. 다만 서사가 빈약했다. '둠'의 개발자 존 카맥이 "게임의 스토리는 포르노의 그것과 같다"고 농담할 정도로, 이야기 장치로서의 게임은 드물었다. '콜 오브 듀티' 같은 영웅담은 그 황무지 위에 뿌리를 내리며 저변을 넓혔다.
1인칭 카메라는 플레이어의 눈과 캐릭터의 눈을 포갠다. 화면 아래쪽 중앙에 총이 떠 있다. 그 총을 쥔 손이 내 손처럼 느껴진다. 적이 뛰쳐나오면 나는 반사적으로 조준점을 움직인다. 이 순간 플레이어는 관찰자가 아니다. 가담자다.
이 매체적 특성이 '콜 오브 듀티'의 영웅담을 가장 강력한 형태로 끌어올린다. 영웅의 쾌감이 외부 관찰이 아니라 내부 경험으로 도달한다. 영웅담 역사상 처음 도달한 밀도다.
2007년작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의 'All Ghillied Up' 미션을 보자. 플레이어는 젊은 시절의 프라이스 대위가 된다. 상관 맥밀런과 함께, 작중 시점 15년 전 체르노빌 인근 도시 프리피야트로 잠입한다. 길리 슈트를 입고 풀밭에 엎드린 채 수십 분을 기어 적진을 통과한다. 순찰병이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갈 때는 숨조차 죽여야 한다.
이 미션의 서사적 기능은 '시간성'이다. 플레이어는 젊은 프라이스의 한 작전을 직접 체험한다. 게임은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플레이 경험으로 엮는다. 프라이스가 어떤 궤적을 거쳐 지금의 프라이스가 되었는지, 플레이어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배운다.
독일 철학자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지평의 융합(Horizontverschmelzung)'이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순간, 우리는 어느 한쪽도 순수하게 볼 수 없고 두 지평이 뒤섞인 제3의 시야를 얻는다는 것. 'All Ghillied Up'은 이 개념의 게임적 구현이다. 플레이어는 과거의 프라이스가 되지만, 그 과거는 이미 현재의 프라이스를 아는 눈을 통과한다. 젊은 프라이스의 총구 너머로 늙은 프라이스의 얼굴이 겹친다. 이 겹침이 플레이어를 영웅의 계보 안에 끌어들인다. '나는 지금 역사의 한 장을 쓰고 있다'는 감각. 영웅담이 플레이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다.
영웅담은 적이 있어야 성립한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의 헥토르가 있어야 영웅이 된다. 프로도는 사우론이, 루크 스카이워커는 다스 베이더가 필요하다.
독일 법학자 칼 슈미트는 1932년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정치의 본질은 친구와 적의 구분"이라고 못 박았다. 누구와 함께하고 누구에게 맞설 것인가. 이 구분이 모든 정치의 출발이다. 슈미트는 이 관찰을 파시즘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끌고 갔고, 그의 정치적 운명은 나치 부역으로 끝났다. 그러나 관찰 자체는 정확했다. 정치와 마찬가지로, 영웅담도 친구와 적의 구분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콜 오브 듀티'의 적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2차대전 시리즈의 나치. 모던 워페어의 러시아 극초민족주의자. 블랙 옵스의 소련 정보부. 블랙 옵스 2의 남미 마약 카르텔. 어드밴스드 워페어의 민간군사기업. 이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모호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화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나쁘고, 나쁜 이유를 게임이 일일이 설명해준다. 민간인을 죽였고, 핵을 훔쳤고, 대통령을 납치했다.
이 '모호하지 않음'이 '콜 오브 듀티'의 이념적 뿌리다. 미국 문학평론가 리처드 슬롯킨은 『Gunfighter Nation』에서 미국 대중문화의 뿌리를 '프런티어 신화'에서 찾았다. 개척자 대 야만인. 보안관 대 무법자. 카우보이 대 인디언. 이 이항 대립은 서부극을 거쳐 전쟁영화로, 전쟁영화를 거쳐 '콜 오브 듀티'로 이어진다. 미국은 늘 '프런티어를 넘는 영웅'의 이야기로 자신을 설명해왔고 지금은 아주 확고하게 자리잡은 FPS의 전형이됐다.

'배틀필드'는 다른 모델을 내놓는다. 집단의 영웅담이다. '배틀필드 1'의 캠페인은 'The War Stories'라는 앤솔로지 구조를 취한다. 에피소드마다 다른 병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국 전차병, 이탈리아 아르디티 돌격대, 오스만에 맞선 베두인 전사, 호주 갈리폴리의 병사로 분한다.
19세기 영국 사상가 토마스 칼라일은 1841년 『영웅과 영웅 숭배에 대하여』라는 강연집을 냈다. 그의 핵심 주장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역사는 위대한 인물들의 전기에 불과하다." 이른바 '위인사관(Great Man Theory)'이다.
20세기 들어 마르크스주의, 아날학파, 사회학이 등장하며 칼라일의 이론을 거의 모든 지점에서 허물었지만 그럼에도 게임을 비롯한 대중문화에서는 여전히 잘 작동한다.
이유는 독일 심리학자 브루노 베텔하임의 1976년 책 『옛이야기의 매력』에 있다. 그는 동화가 왜 아이들에게 필요한지를 정신분석학으로 설명하며 이렇게 썼다.
"아이는 세상이 무서운 곳임을 안다. 동화는 그 무서운 세상이 '극복될 수 있음'을 약속한다. 그래서 아이는 동화를 필요로 한다."

이 진단은 어른에게도 그대로 옮겨간다. 어른도 세상이 무서운 곳임을 안다. 영웅담은 그 무서운 세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프라이스 대위가 있으면 악은 제거할 수 있다. 마스터 치프가 있으면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다. 관우가 있으면 난세에도 의리는 살아 있다.
칼라일이 위대한 인물을 숭배한 것은 지적 오류였을지 모르지만, 그가 짚은 심리적 필요는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는 모두 평범하다. 평범한 자에게, 비범한 이야기는 약이다. 그래서 전쟁이 영웅을 가장 잘 그리는 것이다.
2. 참호 속의 편지 — 전쟁은 누구의 것인가
발터 벤야민은 파시즘의 본질을 '정치의 미학화'라 불렀다. 그가 이 말을 할 때 염두에 둔 장면은, 이탈리아 미래주의자들이 전차의 쇳소리를 교향곡이라 부르던 모습이었다. 지금의 게임은 그보다 훨씬 정교한 미학화를 추구한다. 폭발 직후의 이명, 슬로모션으로 떨어지는 탄피, 급박하게 조이는 배경 현악이 대표적이다.
전쟁은 이미지가 된다. 이미지는 소비된다. 기 드보르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경고한 구조 그대로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전쟁 사진이 연민을 낳는지,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인지를 물었다.
이런 미디어 소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게임이 있다. 2014년 폴란드의 작은 스튜디오 11bit studios가 낸 '디스 워 오브 마인'이 이 계보의 대표작이다. 모티브는 1992–1996년 사라예보 포위전이다. 최근 부자들이 돈을 내고 저격수 거리에서 인간사냥을 즐겼다는 '인간 사파리' 사건으로 다시 조명받는 바로 그 전쟁이다.
플레이어는 병사가 아니라 파괴된 아파트에 갇힌 민간인 서너 명을 지휘한다. 낮에는 저격수가 창밖을 겨누고 있으니 숨어 자야 하고, 밤에는 파편 속을 기어다니며 통조림과 약품을 훔쳐와야 한다.

게임의 구조는 잔혹할 만큼 단순하다. 자원이 부족하면 사람이 죽는다. 나무를 태워 난로를 돌리지 않으면 캐릭터가 얼어 죽고, 약을 구하지 못하면 병으로 죽는다. 그래서 플레이어는 이웃집을 털러 간다. 처음에는 빈집만 골라 들어간다. 그러나 빈집은 곧 사라진다. 결국 노부부가 사는 집 문을 연다. 남편이 말한다.
"제발, 우리 먹을 것밖에 없습니다." 플레이어는 무시한다. 통조림 두 개를 가방에 넣으며, 캐릭터가 오늘 일기에 무엇을 쓸지 직감한다. 그 일기는 게임 크레디트까지 따라온다. "오늘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캐릭터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게임을 끝내면 엔딩 크레디트 대신 실제 사라예보 포위전 생존자들의 사진이 뜬다. 개발진이 직접 인터뷰한 실존 인물들이다.
2012년작 '스펙 옵스: 더 라인'은 다른 길로 같은 질문에 닿는다. 무대는 모래폭풍에 삼켜진 두바이. 플레이어 캐릭터 워커 대위는 실종된 미 육군 33대대를 구하러 잠입한다. 게임 중반부, 워커는 박격포에 장착된 원격 카메라로 적진을 내려다본다. 화면은 흑백이다.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움직인다. 플레이어는 '전술적 선택'으로 백린탄을 쏜다. 적이 제거된다. 워커가 그 구역을 통과할 때, 연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민간인 수십 명의 시체다. 한 여자가 아이를 끌어안은 채 타 있다. 플레이어는 이 장면을 건너뛸 수 없다. 그 시체들 사이를 워커와 함께 걸어야 한다.

게임은 이후 플레이어를 학대한다. 로딩 화면이 묻는다. "아직도 영웅이 된 기분인가?" 마지막에 이르러 전모가 밝혀진다. 워커가 찾는 콘래드 대령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워커가 대화한 콘래드는 환각이었다. 두바이에서 벌어진 모든 학살은 워커, 즉 플레이어가 저지른 짓이었다. 엔딩은 네 가지다. 자살하거나, 대원들을 죽이거나, 구조대에 항복하거나, 구조대를 전멸시키고 혼자 남는다. 어느 엔딩도 승리가 아니다.
콘래드 대령의 이름은 치밀한 설계의 산물이다. 각본가 월트 윌리엄스는 조셉 콘래드의 1899년 소설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을 게임의 골격으로 삼았다. 콩고 강을 거슬러 오르던 말로우 선장이 광기에 빠진 커츠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1979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지옥의 묵시록』으로 각색하면서, 커츠는 베트남 정글 속에 자신의 왕국을 세운 미 육군 대령으로 바뀌었다.
콘래드 소설의 유명한 마지막 말 "The horror. The horror."는 게임 중반 어느 장면의 벽에 그래피티로 적혀 있다. 플레이어가 그 벽 앞을 지나가도 게임은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게임이 말하고 싶은 걸 알려준다.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이 제국주의의 광기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지옥의 묵시록』은 개입주의 전쟁의 광기에 관한 이야기였다. '스펙 옵스: 더 라인'은 21세기 미국의 중동 개입에 관한 이야기이자, 더 근본적으로는 그 개입을 오락으로 소비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다. 즉, 이 게임은 '콜 오브 듀티'를 정조준한다.
같은 해 유비소프트 몽펠리에가 내놓은 '밸리언트 하츠: 더 그레이트 워'의 분위기는 동화책 같다. 하지만 내용은 가혹하다. 프랑스인 에밀, 에밀의 사위인 독일인 카를, 미군 프레디, 벨기에 간호사 안나, 의무견 월트. 다섯 시점이 1차대전의 서부 전선을 교차한다. 챕터 사이마다 실존 참전용사들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끼어든다. 한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우리는 여기서 쥐와 함께 잔다. 쥐가 더 편해 보인다."
게임은 사라예보 사건을 시작으로 마른, 이프르, 베르됭, 솜, 비미 능선, 니벨 등 1차대전의 주요 격전지를 무대에 올린다. 에밀은 여러 활약으로 훈장을 받는다. 그러나 참호전에서 서로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독일군 병사를 제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에 깊은 모멸감과 환멸을 느끼고, 훈장을 불태운다.
끝없는 전쟁에 지친 그는 결국 니벨 공세에서 병사들을 사지로 내몬 장교를 야전삽으로 때려 죽인다. 이후 항명과 상관 살해 혐의로 총살당한다. 게임의 마지막 장면에서 안나가 에밀의 무덤 앞에서 편지를 읽는다. 이 대목에서 키보드에 손을 얹은 채 자리를 뜨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이 게임은 말한다. 진짜 최종 보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고. 전쟁 그 자체라고.

2013년작 '페이퍼스, 플리즈'는 또 다른 각도에서 전쟁의 구조를 들여다본다. 플레이어는 허구의 동구권 국가 '아르스토츠카'의 입국심사관이 되어 여권과 비자를 대조한다.
직접적 전쟁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게임 전체가 체제의 해부도다. 관료제, 국경, 서류, 명단 등 전쟁을 가능케 하는 후방의 구조를 보여준다. 총알 한 발 나오지 않는 게임이지만, 전쟁이 실제로 굴러가는 방식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준다. 관료들의 작은 순응이 쌓여 어떻게 거대한 비극이 되는지를 포착한다.
'Glory to Arstotzka'라는 슬로건이 매일 아침 화면을 덮고, 저녁마다 플레이어의 가족 중 누군가 굶거나 병든다. 뇌물을 받을까, 위조 서류를 눈감아줄까, 저항 조직의 부탁에 응할까. 어느 쪽을 골라도 대가가 따른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한 '악의 평범성'을 여과 없이 체험할 수 있다.
코지마 히데오의 '메탈 기어 솔리드' 시리즈는 이 계보의 또 다른 기둥이다. 40년에 걸쳐, 핵 탑재 이족보행 병기 '메탈 기어', 민간군사기업, 유전자 조작 병사, 음모론 조직 '애국자들'을 통해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까지의 전쟁 경제를 집요하게 서사화했다.
'MGS3: 스네이크 이터'는 시리즈의 정점이다. 냉전 한복판, 주인공은 자신의 스승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인 'The Boss'를 제 손으로 쏘아 죽인다. 흰 들판, 스승의 무덤 앞에서 경례하는 엔딩은 게임 매체가 만들어낸 가장 긴 침묵 중 하나다.

코지마는 이 장면에서 무려 3분 가까이 플레이어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버튼을 눌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서서 지켜봐야 한다.
이 두 번째 계보의 게임들은 벤야민의 '정치의 미학화'와 정반대의 작업을 한다. 전쟁을 추하게, 지루하게, 비겁하게 그린다. 전쟁은 총격전이 아니라 배고픔이고, 이별이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다. 이 게임들은 소설이나 영화가 감히 하지 못한 일을 해낸다. 플레이어를 공범으로 만드는 일이다.
3. 전후 폐허의 경고 — 포스트 아포칼립스
전쟁을 다루는 세 번째 방식은 전쟁 '이후'를 그리는 것이다. '폴아웃'의 핵겨울, '메트로'의 지하철. 인류가 자기 손으로 문명을 부순 뒤의 세계다. 이곳의 지배적 정서는 공포가 아니다. 기이한 향수다.
'폴아웃'의 설정은 이렇다. 냉전이 끝나지 않은 대체 역사 속, 2077년 미국과 중국이 서로에게 핵을 쏘아 대전쟁(Great War)이 터진다. 세상은 리셋된다. 주인공은 'Vault'라는 지하 벙커에서 태어나 자란 인물이다. 200년 만에 지상으로 나와보면, 주크박스에서는 여전히 잉크 스팟츠의 'I Don't Want to Set the World on Fire'가 흐르고, 진공관 컴퓨터가 돌아가며, 콜라 병은 '누카콜라'라는 이름으로 방사능을 머금은 채 남아 있다.
'폴아웃'이 그리는 것은 파괴된 미래가 아니라 파괴된 과거다. 1950년대 냉전 초기의 '핵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낙관이, 정확히 그 약속대로 인류를 멸망시킨 세계다. 인류는 오히려 더 야만적으로 변한다. NCR(뉴 캘리포니아 공화국), 시저의 군단, 엔클레이브, 브라더후드 오브 스틸 같은 파벌들이 폐허 위에 새 국가를 세우려 다툰다. 각 파벌은 공화정, 제국주의, 테크노크라시 등 옛 미국의 얼굴을 대변한다.

'메트로 2033', '라스트 라이트', '엑소더스'는 드미트리 글루홉스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4A Games의 3부작이다. 핵전쟁 이후 지표면이 방사능에 뒤덮이자, 생존자들은 모스크바 지하철의 역(驛)을 국가 삼아 살아간다.
각 역은 곧 이념이다. 한쪽 역은 공산주의, 다른 역은 신나치, 또 다른 역은 한자동맹식 상업연합. 주인공 아르툠은 '다크 원'이라는 돌연변이의 정체를 쫓아 터널을 돌파한다. '엑소더스'에서 그는 처음으로 지상으로 나간다. 카스피 해, 타이가 숲, 시베리아 강. 도스토옙스키와 플라토노프의 우수(憂愁)를 FPS로 겪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스토브에서 판매 중인 'ATOM RPG'와 후속작 'ATOM RPG: Trudograd'도 빠질 수 없다. 설정은 1986년 소련과 NATO 사이에 전면 핵전쟁이 벌어졌다는 대체 역사다. 무대는 19년이 지난 소비에트 황무지다. 시스템은 1997년 '폴아웃'과 1998년 '폴아웃 2'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아이소메트릭 뷰, 턴제 전투, 속성·스킬·퍽(perk)으로 짜인 캐릭터 빌드가 그대로다. 이는 동종 장르에서 흔한 일로, '웨이스트랜드' 등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정서는 전혀 다르다. '폴아웃'이 '핵 이후에도 잔존한 1950년대식 미국 자본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풍자'라면, 'ATOM RPG'의 폐허는 '소련적 일상이 방사능과 함께 화석화된 공간'이다.
버려진 흐루쇼프카 아파트, 푸시킨을 암송하는 도적, 여전히 돌아가는 지하 양조장, 벙커 벽에 걸린 스탈린의 초상화. 여기서 플레이어는 '폴아웃'에서 느끼던 풍자적 거리감과는 다른 것을 만난다. 지상이 죽어도 일상은 죽지 않는다는 완고한 진실이다. 사람들은 차를 끓이고, 농담을 주고받고, 시를 외운다. 체제가 사라져도 사람의 습관은 남는다.
요코 타로의 '니어: 오토마타'는 서사 끝에 실존의 질문을 던진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해 인류가 달로 피신한 뒤, 지상에는 인류를 대신해 싸우는 안드로이드(2B, 9S, A2)와 외계인이 만든 기계생명체만 남았다는 설정이다.
이 게임은 '전쟁 게임'이 아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왜 전쟁이 계속되는지를 묻는 게임이다.
인류는 수천 년 전에 이미 멸종했고, 외계인들도 전멸했다. 그런데도 안드로이드와 기계생명체는 여전히 서로를 죽인다. 보드리야르가 『시뮬라시옹』에서 말한 바로 그 구조다. 모사가 원본을 대체하고, 원본이 사라진 뒤에도 모사는 계속 유통되는 구조다.
주인이 사라졌는데도 싸움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전쟁이 그들에게 공짜로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적이 있으면 내가 누구인지 안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 평화가 찾아오면 "나는 왜 사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이 열리지만, 전쟁은 이 질문을 막아준다. 이 게임의 진단은 잔혹하다. 전쟁은 의미를 공짜로 주는 가장 편한 주인이다. 모든 선택이 나의 선택이다. 책임을 떠넘길 대상이 없다.
장 폴 사르트르는 1946년 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자유형에 처해졌다." 우리에게는 주어진 목적이 없다. 신은 우리를 왜 만들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자연도 우리의 역할을 지정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매 순간 스스로 의미를 골라야 한다. 이것이 자유라고. 그리고 사르트르는 이 자유가 끔찍하다고 덧붙였다. 기댈 곳이 없기 때문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의 인기는 이 말의 또 다른 증거다. 전쟁이 끝난 세계를 상상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지금 이 체제에 대한 깊은 피로를 드러낸다. 폐허는 새 시작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 약속은 대개 전쟁 자체보다 무겁다. '폴아웃'의 향수도, '니어'의 절망도 결국 같은 질문을 비춘다. 우리가 만든 이 세계는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가.
4. 전략가의 의자 — 전쟁을 숫자로 본다는 것
네 번째 계보는 조금 다르다. 플레이어가 참전자가 아니라 국가 그 자체인 게임들이다. '하츠 오브 아이언', '삼국지' 같은 작품에서 플레이어는 국가의 수장이 되어 전쟁을 운영한다.
이런 게임에서 전쟁은 지도 위에서 색이 바뀌는 일이다. 병사는 '사단' 단위로 집계되고, 사상자는 '남는 인력' 풀에서 차감된다. 플레이어가 신경 쓰는 것은 GDP, 산업 생산, 외교 관계, 연구 속도, 기동력 지수다. 전쟁은 숫자가 된다.
이 냉정함이 비인간적이라는 비판은 정확하지만 완전하지는 않다. 역사는 원래 두 얼굴을 가졌다. 전장에서 죽는 병사의 얼굴과, 본국 지도 위에서 핀으로 고정된 사단의 숫자.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전쟁을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 규정했을 때, 그는 이 두 얼굴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 '하츠 오브 아이언'의 플레이어도 마찬가지다. 보병사단 38번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멸했다는 보고는 숫자지만, 그 숫자에 붙는 무게는 정치적 선택의 무게다.

'스타크래프트'와 '커맨드 앤 컨커'는 더 단순한 버전이다. 자원을 채취하고, 기지를 짓고, 병력을 뽑아 적을 친다. 미네랄이 있어야 해병을 뽑고, 베스핀 가스가 있어야 시즈 탱크를 만든다. '재료가 있어야 싸운다'는 전쟁의 본질이 RTS라는 장르의 규칙 자체에 내장돼 있다.
실제 전쟁도 그랬다. 독일이 1941년 카프카스로 진격한 이유는 바쿠 유전을 원해서였고, 일본이 1941년 진주만을 친 이유는 금수 조치로 석유가 끊겼기 때문이다. RTS는 이 구조를 가장 정직하게 시각화한다.
전쟁은 단순한 총격전이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이다. 영웅이 없어도 전쟁은 일어난다. 비극을 기록하는 사람이 없어도 전쟁은 계속된다. 엑셀 시트 위에서도 전쟁은 굴러간다.
5. 폴리곤 참호는 매번 다른 방식으로 묻는다
게임은 전쟁을 네 가지 방식으로 다룬다. 영광의 무대로, 참혹한 증언으로, 끝난 뒤의 풍경으로, 숫자와 시스템으로. 네 방식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우리 시대의 얼굴을 비춘다. '콜 오브 듀티'의 쾌감은 이 시대 오락의 속도를 말하고, '디스 워 오브 마인'의 고통은 우리가 놓지 않으려는 양심을 증언한다. '폴아웃'의 폐허는 우리가 몰래 품고 있는 체념과 희망을 비추고, '하츠 오브 아이언'의 지도는 전쟁이 어떻게 정치의 문법 안에서 굴러가는지를 드러낸다.
책과 영화에서 독자와 관객은 구경꾼이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가담자다. 방아쇠를 당기는 것도, 총을 내려놓는 것도, 불타는 도시를 지나치는 것도, 지하실의 아이에게 마지막 통조림을 건네는 것도, 결국 내 손이다. 이 가담이 전쟁에 대한 감수성을 마비시킬 수도, 오히려 더 예리하게 벼릴 수도 있다. 어느 쪽인지는 게임이 혼자 결정하지 않는다. 만드는 사람과 하는 사람이 함께 결정한다.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의 마지막 장에서, 순수한 놀이가 사라지면 문명도 사라진다고 썼다. 전쟁을 놀이로 만드는 일은 불온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전쟁을 놀이로 만드는 일은 전쟁을 사유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체스판이 중세의 전략을 학습시켰듯, '스펙 옵스: 더 라인'은 21세기의 개입주의가 어떤 결말에 이르는지를 가르친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은 전쟁 속 민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 번도 포위된 적 없고 한 번도 저격수의 총탄을 걱정하며 살아본 적 없는 플레이어에게 전한다.
게임이 전쟁을 다루는 방식은 결국 우리가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은지의 문제다. 영웅으로 기억할지, 비극으로 기억할지, 돌아오지 않을 풍경으로 기억할지, 지도 위에 색칠된 칸으로 기억할지. 네 방식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이 공존이 어지러울 때, 우리는 비로소 질문을 얻는다. 나는 전쟁의 어떤 얼굴을 정말로 보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얼굴을 가장 보고 싶어 하는가.
폴리곤 참호는 굳건하다. 그곳에서 우리는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다시 태어나며, 매번 다른 방식으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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