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레르 옵스퀴르:33원정대
게임 출시 전 인터뷰를 보면 빠짐없이 언급되는 단어가 있다. ‘본질'. 게임의 본질은 무엇일까? 나는 게임의 본질은 재미라고 생각한다. 평가는 다를지언정 양판소 같은 게임부터 몇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명작 모두 재미를 목표로 만든 결과물이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클레르 옵스퀴르: 33원정대'는 본질에 가까운 게임이다. 눈과 귀 그리고 손이 즐겁다. 재미있다. 설명하는데 더 많은 단어가 필요 없다.
우선 멋진 피하기와 패링이 있다. 패드 잡은 두 손 가득히 느껴지는 ‘FF8’의 트리거를 다시금 경험할 수도 있다. 불만이 있을 수 없다. 여기에 멋진 음악과 분위기 있는 아트워크, 매력 있는 서사가 얽혀 있다. 굳이 단점을 꼽으라면 파편화된 플랫폼별 사용경험의 차이나 패치 속도 정도뿐이다. 재미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부분들이다.
여태껏 해온 수많은 게임 중에서도 재미있는 게임 범주 안에 들어가기 충분하다. 여기에 ‘쀠땅'이라는 말까지 알려준다. 교육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몰입감을 위해 21:9 모니터와 듀얼오리로 하드웨어를 업그레이드하는 귀찮음까지 감수했다. 지갑으로 증명한 셈이다. 더 이상 평가와 설명은 필요 없을 거 같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게임은 예술적, 문화적, 기술산업적 가치를 붙여 존재와 쓸모를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이런 강박이 너무 심한 나머지 게임을 표현하는데 게이머가 나서서 스스로 인문, 사회, 예술 분야의 사족을 붙여야 하는 지경에 왔다.
“이 게임은 재미있어요” 혹은 “이 게임은 좋아요”라는 말을 주류사회에 하기 위해서는 온갖 현학적인 말을 더해야 한다. 처음엔 게임의 산업적 가치, 문화적 가치를 더해야 했고 이제는 예술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워도 부족해 보인다. 그러다 보니 형용사와 미사여구, 철학을 더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작가주의적, 교조주의적 접근도 보인다. 전도되고 호도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하나의 미디어로서 연구되는 한편 ‘대중 취미', ‘대중 문화’로서 접점을 스스로 없애는 기이한 모습이 보이곤 한다. 그렇게 어느 순간인가 게임이 가진 순수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에 대한 평가는 사라지고 플레이 과정 자체에서 느껴지는 리듬과 몰입감은 무시되는 지경이다.
게임의 목적은 단연코 유희다. 게임이야말로 순수하게 ‘쓸모없음 그 자체'의 가치를 제일 잘 보여주는 미학이다. 아무 쓸모가 없지만 그 자체로 구조가 있고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플레이는 생존과 관련 없다. 이익도 없다. ‘쌀먹’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런 일그러진 생각은 잠시 접어두자.
앞서 이야기했듯 클레르 옵스퀴르는 게임 그 자체로 재미있는 게임이다. 이 글은, 이 정도로는 설명이 부족한 이들을 위한, 이미 대중이 쉽게 접하고 있는 문화인데 ‘게임은 문화다' 캠페인을 해야 한다고 믿는, 게임이 영화나 소설만큼 예술적이고 아름다워야 한다며 끊임없이 이유를 부여하고 문화적, 인문학적 서사와 기술과 문화의 융합 같은 형용사를 수없이 붙여야 하는, 그렇게 해서 게임산업의 존재를 어떻게든 증명하고 표현하고 포장해야만 가치를 인정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설명이다.
그게 아니라 그냥 게임이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냥 해라. 재밌다. 클레르 옵스퀴르는 완벽하게 쓸모없음에 부합한다. 다 하고 나면 ‘이런 내용도 게임 속에 있었구나' 며 곱씹는 정도다. 참.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다. 스토리에 예민하다면 게임을 끝까지 더 플레이하고 오길 부탁한다.

Clair(밝음)
게임에서 가장 먼저 플레이어를 맞이하는 건 여타 다른 게임과 달리 음악이다. 음악 그 자체로 이야기를 전달할 것이라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이 게임에서 음악은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플레이어와 게임을 노래를 매개로 감정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이며 게임 시작부터 끝까지 지속된다.
클레르 옵스퀴르의 이야기를 거창하게 설명하자면 존재와 상실의 탐구다. 모든 존재는 명암을 가지고 있다는 주제의식을 기저에 깔고 인간 향기로 패드의 스피커와 모니터를 농밀하게 채운다.
작품에서 대비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존재의 양면성은 게임을 관통한다. 게임의 세계는 소리로 기억을 말한다. 마치 가수 ‘영턱스클럽’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첫사랑과 만두가 떠오르고 기생충 OST ‘믿음의 벨트'가 흘러나오면 음악이 주는 느낌과 전혀 다른 포근함과 사랑스러운 기억이 떠오르는 일그러진 조화처럼 말이다.
음악은 제목인 클레르 옵스퀴르에 어울리는 구조와 가사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플레이어를 몰입시킨다.
‘클레르 옵스퀴르’(Clair-obscur)’는 미술에서 흔히 사용하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는 명암법의 프랑스식 표현이다. 밝음(chiaro)과 어둠(oscuro)이라는 이탈리아어 단어의 합성어다.
이 기법은 명암의 강한 대비를 이용해 입체감과 깊이를 표현한다.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화면에 드라마틱한 효과를 준다. 인물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강조하는 데 사용하며 평면 위에 입체감, 공간감을 창출하는 데 탁월하다.
수록 음악은 음향의 명암 대비를 구현해 단조롭지 않고 순간순간 전환되는 분위기와 텍스처로 리듬감을 구성한다. 고음과 저음, 밝은 화음과 불협화음, 관현악의 고전성과 전자음의 파열음이 교차하면서 끊임없는 대비를 만든다.
단순한 사운드 디자인이 아니라 게임의 테마인 존재론을 음악으로 번역하고 구조화한다. 그냥 몇몇 음악이 분위기와 잘 맞는 정도였으면 그냥 좋은 게임 음악 이겠거니 싶겠지만 숨겨진 아이템 33개가 대부분 음반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이 게임은 음악에 진심인 게 분명하다.

영화음악의 거장 한스짐머는 게임 OST 제작을 매우 어려워했다. 영화는 선형적 시간을 따라가 관객의 감정을 조율할 수 있는데 비해 게임은 플레이어의 선택, 행동, 속도에 따라 진행이 달라지는 탓이다. 어떤 감정의 고조를 넣고 싶어도 플레이어가 갑자기 숨겨진 아이템을 찾으려 하거나 길을 잃으면 음악이 맥을 잃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개발에 참여했던 ‘콜오브듀티’나 ‘블레스’ 등의 음악을 들어보면 영화와 사뭇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영화 음악은 관객의 감정을 유도할 수 있지만 게임 음악은 감정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클레르 옵스퀴르는 마치 한 화가가 만들어낸 세계와 같기 때문에, 음악도 물감이 흘러내리듯, 붓 터치가 번지는 듯한 흐름으로 잘 녹아든다.
분위기를 설정하고 장면에서 묘사되는 감정에 여분의 레이어를 추가하는 역할을 잘 수행한다. 전체적으로 풀 오케스트라나 챔버를 바탕으로 하지만, 고전적인 선율보다는 낯설고 실험적인 화성, 감정의 파열음을 담은 음색이 신선하게 추가된다. 감미로운 선율뿐 아니라 종종 불협화음이나 낮은 현악기 떨림, 금관의 격정적인 포효로 불안과 긴장감도 켜켜이 쌓는다. 심지어 보컬은 인공어로 포인트를 줘 독특한 느낌을 가미한다. 낯설고 기이한 전자적 질감을 혼합해 ‘기괴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공식 OST에 포함된 ‘루미에르(Lumière)’가 대표적인 예다. 바이올린 2, 비올라, 첼로2, 콘트라베이스, 피아노로 이뤄진 챔버는 게임의 시작 도시인 루미에르를 귀로 보여준다.
도입부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로 시작한다. 피아노는 12개의 서로 다른 피아노 사운드를 레이어링해 만들었다고 한다. 중반부에 현악기가 가세해 감정선을 끌어올린다. 도시의 활기를 표현함과 동시에 이면에 숨겨진 불안감을 표현한다.
리듬은 느리고 불안정하지만 매력 있게 나아간다. 음계는 대개 단조 또는 프리기안 선법(Phrygian Mode)을 사용해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부여한다. 어딘가 으스스한 분위기도 풍긴다.

선법은 장단조 체계가 나오기 전 서양 음악에서 활용한 체계다. 최근 대중음악에서는 장단조의 단조로움을 깨고자 활용하기도 한다. 프리기안 딸림 음계는 여러 민속 음악(스페인, 아라비안)에서 자주 쓰이기도 하는데 불안하며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고마주를 앞둔 도시의 모습을 단 한 글자의 텍스트도 없이 확실하게 전달해주는데 이보다 좋은 도구가 있을까 싶다.
*고마주(Gommage)는 작중에서, 원정대의 목표인 페인트리스(Paintress)가 거석(모노리트) 위에 숫자를 새기면, 그 숫자와 같거나 큰 나이의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연기와 꽃잎처럼 사라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
후반부에는 합창이 악보를 뒤덮어 절정에 이른다. 현악기의 지속음과 합창의 잔향이 인상적이다. 바로크 음악 혹은 르네상스 종교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장엄함 속에서 현실이 비틀린 디스토피아적 감각을 전달한다. 뜨거운 숨소리가 터져 나오고 나서야 서서히 마무리되는 구조는 도시의 역사와 운명을 암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음악을 다 들었을 때 플레이어는 도시의 정체성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음악은 빛과 어둠, 아름다움과 불안이 공존하는 도시의 분위기를 섬세하게 표현한다. 세계관과 주제를 암시적으로 표현하며 기대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심어준다.
한국인인 우리는 프랑스어라서 잘 모르겠지만 사실 가사 자체가 스포일러 덩어리다. 프랑스어라고는 ‘셀린 트랑’ 밖에 모르는 우리이기에 좀 더 게임에 집중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이다.

음악은 서사의 기능도 한다. 음악이 연기를 하고 인물이 배경이 되는 셈이다. 음악은 대화와 전투 사이, 공간의 침묵을 채우는 주체다. 플레이어가 어떤 공간에 진입할 때 들리는 배경음은 단순한 분위기 조성이 아니라, 그 공간의 역사와 비극을 암시하는 내러티브 장치가 된다.
과거 학살이 있었던 지역에 들어설 때는 악보가 비워진 듯한 무음의 간극이 등장한다. 음이 뒤틀린 합창이 등장하면 단순한 공포를 넘어 기억 넘어 근원 속 공포를 표현하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음악으로서 말보다 먼저 진실을 말하고, 말보다 뒤에 진실을 덮어버린다는 설명이 어울린다.
‘알리시아(Alicia)’의 경우 게임의 정체성과 감정을 음악적으로 구현했다.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로리앙 테스타르(Lorien Testard)와 보컬리스트 앨리스 뒤포르-페르시에(Alice Duport-Percier)의 협업으로 탄생했다. 멜랑콜리와 향수, 그리고 희망과 고양감을 동시에 전달한다. 단순 배경을 넘어 게임의 세계관과 감정이 저릿하게 전해져 온다.

OSCURO(어둠)
클레르 옵스퀴르 명암법은 대조를 이용해 인물이나 사물의 입체감을 강조한다. 단순한 명암의 구분을 넘어 감정의 깊이나 극적 긴장감을 시각적으로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그렇다고 반드시 완벽한 블랙을 표현하는 OLED로 볼 필요는 없다. IPS(In-Plane Switching) 패널, VA(Vertical Alignment) 패널로 봐도 큰 차이 없다. 가슴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클레르 옵스퀴르는 원정대가 미지의 땅으로 향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원정의 목적은 정복과 거리가 멀다. 자신들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확인하기 위한 순례에 가깝다. 종국에 원정대는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만 그들이 찾은 것은 구체적인 보물 혹은 비밀이 아니다. 플레이어는 원정 자체가 삶의 본질을 탐색하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클레르 옵스퀴르의 서사는 독특하다. 1, 2막과 3막의 구조가 확연히 다르다. 왕도적인 루트를 충실히 따르며 재미를 주다가 해석이 나뉠 만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다가 여운을 남긴다.
물론 플레이어는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어리둥절하기 십상이다. 의도된 디자인이지만 초반에 재미를 주었던 인물들이 병풍이 되어버리고 인물 간 서사도 흐트러져버려 몰입이 흔들린 탓이다. 주인공 전환이 매끄럽지 못해서 생긴 기술적 문제로 보인다. 작중에서 플레이어는 원정대원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한다.
그러다 갑자기 무량공처(無量空處)식으로 정보를 주입하고 감정을 다르게 이입해야 하니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역시 대비라는 관점에서 놓고 보면 구조적으로 의도한 기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선택과 집중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주제가 불분명해지고 난잡해지고, 무엇보다 길고 현학적으로 변할 테니 2막과 3막을 구분 지어놓고 이야기를 풀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평면이 아닌 ‘존재하는 무게’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자 비틀었다. 캔버스 속 대비로 자연스럽게 감정선에 동화를 유도한다.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자면 철학과 감정, 존재의 깊이를 조형하는 예술적 장치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고 빛이 있어야 어둠이 보인다. 그 사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해석이다. 내면의, 이중성 또는 빛과 어둠의 공존을 상징하는 방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결말은 카뮈의 실존주의적 부조리와 연결된다. 인간은 끊임없이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결국 삶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부조리를 마주하게 된다. 원정대는 무의미와 마주하며 진실을 받아들인다. 중요한 건 목적지가 아니라 거기까지 향하는 과정이었고 여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다.
화려한 액션이나 승리의 쾌감의 이면에는 이와 대비되는, 플레이어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 질문이다.

33 EXPEDITION
게임을 하면서 줄곧 왜 33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게임 전체에 서려 있는 신비로운 분위기에 맞춰 수비학(數秘學)적인 접근을 해보았다. 일산 신도시의 길들이 남북방향으로는 좁고 동서 방향으로 넓다거나 압구정 현대 아파트 강안 부엌 쪽에 총구 거치대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시대이지 않는가? 혹시나 해서 말하자면 수비학은 숫자가 지닌 숨겨진 의미를 탐구하는 철학적·신비주의적 학파다.
수비학적 관점에서 숫자 '33'은 완성, 계몽이라는 뜻을 가진다. 완성, 구원, 그리고 초월의 의미를 상징한다. 이외에도 연민, 치유, 영적 각성을 상징한다.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면 게임의 주제와 일맥상통한다.
11, 22, 33은 일반적인 수비학 숫자와 달리 독립적인 상징성을 가진다. 이 중에서도 33은 특별히 강력하고 신성한 의미가 있는 ‘마스터 넘버(Master Number)’로 불린다.
창작물에서 숫자를 활용하는 건 메시지를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인 경우가 많다. 원정대의 전투 파티가 3명인 것, 이름이 33인 것은 게임에서 전하는 메시지와 연결해 볼 수 있다. 게임의 서사에 빗대자면 1, 2막과 전혀 달라지는 3막의 차이도 의도가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근본적인 존재를 수용하고 이를 넘어서는 핵심 주제는 수비학적인 상징과 소통한다. 혹은 그 반대 거나.
좀 더 음모론 관점에서 33이란 숫자를 보면 33은 세상을 뒤흔드는 숫자다. 음모론자들은 ‘중요 사건들에 33이라는 숫자가 숨어 있다’고 주장한다. 케네디 대통령은 11월 22일에 암살(11+22=33)됐고 예수 그리스도가 33세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기록에 기인해 ‘33’ 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생애, 희생을 의미하는 수로 여겨지기도 한다.
프리메이슨과 같은 신비주의 단체에서는 숫자 33에 특별한 의미를 담는다. 프리메이슨의 최고 등급은 33도(33rd Degree)다. 깨달음과 영적 완성, 높은 지혜를 상징한다. 33도는 ‘명예 계급(Honorary Degree)’으로 오직 선택된 자에게만 부여된다. 이 때문에 ‘세상을 조종하는 엘리트 비밀결사’라는 상징으로 33이 자주 사용된다.
또 33은 일루미나티 상징 중 하나로 해석되며, 비밀리에 세계를 지배하는 엘리트 집단의 숫자라고 주장한다. ‘33인의 심판자’, ‘33인의 성직자 회의’ 등은 일부 음모론 영상이나 문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게임 속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여정이 승패를 넘어 완성과 구원을 향한 여정이라는 장치라고 해석된다. 결국, 숫자 '33'을 통해 게임 속 세계관과 캐릭터들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함축하며, 플레이어에게 근본적인 성찰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치로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단순히 33살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삶의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본질을 조명한다는 관점에서, 대비는 답이 아니라 질문 속에서, 확실성이 아니라 모호함 속에서 발견된다. 해석이 분분하겠지만, 게임이 남긴 가장 깊은 메시지는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며, 의미는 답이 아닌 질문을 품는 여정에서 형성된다’는 인문학적 메시지를 완성한다.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똥을 싸더라도….
미국 예술가 앤디 워홀의 말로 알려졌지만 사실 아니다. 그 출처가 어딘지 불분명한 이 말은 미디어 산업에 대한 조소 같기도 하고 현대 예술에 대한 선동 같은 느낌도 들며 언제나 감탄과 조롱 사이를 오간다. 가짜 명언임에도 이 문장은 현대 예술에 대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서두에 언급한 대로 클레르 옵스퀴르에 대한 내 평가는 ‘재미있다'로 끝이다. 그럼에도 이처럼 구구절절 말도 안 되는 현학적인 말을 쓴 건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게임’ 이라는 당위성을 부여하고 포장하고 싶어 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 게임의 개발자들을 향해 “여러분은 프랑스의 대담함과 창의성을 보여주는 눈부신 본보기입니다”고 찬사를 보냈다. 과거 프랑스 폭력사태 원인으로 게임을 지목한 이력이 있는 정치인의 발언이었다. 정치인이 말 뒤집는 건 우리 아들이 차은우보다 잘 생겨 보이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지만 대통령이 공식 발언으로 게임을 언급한 건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우리로 치면 대통령이 모두발언 중 “니케 일러스트는 우리시대의 모나리자입니다”라든가 주요 일간지 1면에 ‘XXX 대통령, “게임산업 클러스터 조성에 연 20조 투입… 글로벌 1위 목표"’ 라는 헤드라인이 달리는 셈이니까.
기억을 돌이켜보면 게임은 공식석상에서 긍정은커녕 콘텐츠 그 자체로도 언급된 경우가 거의 없었다. ‘묻지 마 범죄’의 원인으로 지목되거나, 국무조정실에서 언급되는 정도에 그쳤다.
콘텐츠 산업의 긍정적인 면은 언제나 KPOP, 드라마/영화가 차지했다. 행정부의 수장은 오징어게임, BTS를 언급했고, 주무부처의 수장은 국제피아노 콩쿠르 최연소 우승자의 이름을 언급했다. 미디어는 여전히 남이섬을 찾는 관광객과 아이돌 춤을 따라하는 외국 소녀를 앵글에 담는다. 게임은 공식석상에서 상투적인 언어 말고는 불리는 꼴을 본 적이 없다.

한 때 게임이 예술의 결집체라고 외치고 다니던 순간이 있었다. 예술에 포함되지 않았던 그림과 조각이 르네상스를 거치며 예술이 되었듯이, 또 사진과 영화와 만화 등이 20세기에 예술로 인정받았듯이. 게임은 시각예술과 음악, 영상, 문학적 서사가 혼합된 인터렉티브 한 총체예술이라고 소리쳤다.
실제로 최근의 논의 중에는 예술로 ‘인정’받고자 어떠한 실용성이나 사회 · 정치적 참여 등에 이바지한다며 게임의 생산성을 증명하려는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게임은 그러한 효용가치를 충분히 발생시킬 수 있는 매체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결국, 플레이어가 게임을 왜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없다. 플레이어가 정말로 사회적 정치적 실천과 효용을 함양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몇백 시간 동안 앉아 있을까?
그러니까 이렇게 길고 긴말을 쓴 이유는, 클레르 옵스퀴르가 재미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는 거다. 키아로스쿠로 명암법이라든지, 프리기안 선법이라든지, 카뮈 같은 거 언급하지 않아도 게임을 즐기고 느끼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이 악물고 예술적, 문화적 기치를 올리지 않아도, 산업적 가치가 얼마고, 수출을 얼마나 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순수하게 전투가 어떻고 캐릭터가 어떻고 스토리가 어떻다고만 말해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게임이다.
진짜 e스포츠 강국이라면 ‘e스포츠 종주국의 어쩌고' 하면서 내세우지 않아도 되고 진짜 문화라면, 예술이라면 목에 핏발 세우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재미있으면 그만이다. 재미있는 게임이니 그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더 찾아보는 것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자가 복제 게임들이 판치는 시절에 좋은 게임의 등장이 참 반갑다. 의도를 드러내지 않아도 알아서 다 찾아내고 회자한다. 재미있으면 된다. 그게 게임의 본질이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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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콘텐츠를 기사에서 인용 시 ‘스마일게이트 뉴스룸’으로 표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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